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라틴어: Titus Manlius Torquat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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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0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증조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할아버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아버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손자)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손자)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5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 |
동기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4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동기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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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원로원의 거물로서 한니발 바르카의 침공으로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 나라를 이끌었다.2. 생애
그가 속한 만리우스 씨족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고귀한 귀족 집안으로 손꼽혔다. 기원전 480년 첫 집정관을 배출한 걸 시작으로,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집정관 13명에 집정 무관 14명을 배출했다. 토르콰투스라는 코크노멘은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가 켈트족을 물리치고 족장의 토르퀘스(Torques)[1]를 전리품으로 획득한 데서 비롯되었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의 후손들은 대대로 토르콰투스를 물려줬고, 자신들이 주조한 주화에 자랑스럽게 새겼다.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는 갈리아인과 에트루리아인을 상대로 수차례 승리를 거두어 개선식을 여러 차례 거행했다. 특히 군기를 매우 엄격하게 적용해, 자신의 아들이 규율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임페리오수스의 손자이며 그의 증조부인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기원전 299년 집정관을 맡아 에트루리아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기병대를 이끌고 이동하던 중 적의 공격을 받고 낙마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후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같은 이름을 사용했지만, 역사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기원전 235년, 그는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아서 로마에 반기를 든 샤르데냐인들을 진압하고 카르타고군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는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개최하였고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았다. 이는 로마가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종식했음을 상징했다. 기원전 231년,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감찰관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발각되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사임해야 했다. 기원전 224년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포 강을 건너 보이족을 굴복시켰지만, 이후 폭우와 역병으로 인해 군사 활동을 더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인수브레스족과 전투를 치러 적군 2만 3천 명을 죽이고 6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술했다.
이후 기록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직후 재등장했다.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포로를 돌려보낼 테니 몸값을 지불하라고 요구하자, 그는 원로원에 출석하여 "포로들이 겁 먹고 진영에 머물었다가 그대로 잡혔으니, 이런 겁쟁이들을 구하고자 몸값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고 연설하여 관철시켰다. 같은 해에 더 많은 라틴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서 모자라는 장정을 채우자는 주장에 대해 "로마인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짓"이라며 거세게 반대해 그 제안을 물리쳤다.
기원전 215년 사르데냐에서 반란을 일으킨 족장들이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하자, 원로원은 그에게 보병 5천 명과 기병 400명을 맡겨 카르타고군이 오기 전에 반란을 진압토록 하였다. 그는 카랄라市 인근에 상륙하여 현지 정규군과 합세하여 보병 2만 2천 명과 기병 1200명을 규합한 뒤, 반란군을 격파하여 서해안으로 밀어냈다. 얼마 후 카르타고군이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지휘 아래 사르데냐에 상륙하자, 그는 일단 카랄라로 후퇴했다가 반란군과 연합한 카르타고군과 회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참패하여 병사 1만 2천 명이 죽었고, 대머리 하스드루발을 포함한 37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란군 지도자 함프시코라는 자살했고, 사르데냐는 로마의 속주로 돌아왔다.
기원전 212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비누스가 죽으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공석이 되자, 전 동료 집정관인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그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다들 둘 중 하나가 그 자리를 맡을 거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젊고 덜 유명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원전 211년 말 집정관에 지원했지만 안구에 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사임했고,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그 대신 기원전 210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210년 초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 전선을 맡기로 되었으나 시칠리아 주민들의 강한 항의로 난관에 부딪쳤을 때, 그는 마르켈루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결국 라이비누스를 시칠리아 전선으로 보내고 마르켈루스는 이탈리아에서 한니발과 상대하게 했다. 그해 프린켑스 세나투스의 직임을 놓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경쟁했다. 귀족 감찰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는 그를 세나투스에 선임하려 했지만, 평민 감찰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파비우스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양보해야 했다.
기원전 208년 독재관에 선임되어 다음해의 집정관 선거를 조직했으며 기원전 216년 법무관을 역임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가 개최를 약속했지만 그해 갑자기 사망하고 전쟁통에 열리지 못했던 검투 경기를 개최했다. 기원전 202년에 사망했으며, 손자 티투스와 아울루스는 각각 기원전 165년과 164년에 집정관을 맡았다. 이중 티투스는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당한 아들을 가족 재판에 회부하여 집안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조치를 취해 자살하게 하는 등, 실로 엄격하고 가혹한 성격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너무 가혹한 법을 가리켜 만리우스적인 법률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