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 라틴어: Marcus Pomponius Math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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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0년 또는 204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조부)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아버지)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형제)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1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푸블리키우스 말레올루스 |
동기 |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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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폼포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로마 공화국 후기부터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로마의 2번째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버지 폼포니우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누마 폼필리우스의 족보가 로마인들 사이에서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사비니족 남성들이 흔히 사용했던 개인 이름인 폼포에서 유래했을 거라며, 이들이 사비니족이었다가 로마에 귀순한 평민이라고 추정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233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조부인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가 있었다.
기원전 231년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사르데냐인들이 로마를 상대로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들을 토벌할 임무를 부여받고 사르데냐에 출진했다. 고대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도망치는 반란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개를 사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고 로마군이 궤멸되었을 때,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가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하기 위한 독재관에 지명된 뒤 그를 기병장관에 선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2주 후 선거를 부정확하게 실시했다는 비판을 받고 사임했다.
기원전 216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로마와 외국인간의 소송 문제를 담당했다. 기원전 215년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부임했으며 기원전 214년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214년 말 후임자인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로마로 돌아갔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210년과 기원전 204년에 아우구르와 데켐브리(Decemvir: 시빌라 예언서 관리자)를 역임하던 '마르쿠스 폽포니우스 마토'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학자들은 둘 중 한 명은 그의 사촌일 거라고 추정한다.
아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는 기원전 204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를 통치했으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프리카 원정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