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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Appivs Clavdivs Crass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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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350년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사망 | 기원전 271년 (향년 78~79세)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감찰관 | ||
기원전 312년 ~ 기원전 307년 |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307년 |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296년 | |||
고대 로마 독재관 | |||
기원전 28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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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부모 |
父: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母: 이름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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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이름 미상 | ||
자녀 | 9명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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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감찰관, 집정관, 독재관. 본명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로, 카이쿠스는 말년 시력이 나빠져 사실상 맹인이 되어 얻게 된 별명이다.고대 로마 왕정 ~ 공화정 초의 전설시대 인물과 달리, 행적과 업적이 확인된 인물이다. 로마 최초의 포장식 도로 아피아 가도와 로마식 수도교 중 하나인 아피아 수도교를 계획, 입안, 감독했다.
종종 로마의 페리클레스로 비유된 개혁가로, 파트리키임에도 플레브스, 해방노예, 자유민 권익 향상에 진력해, 동료 귀족들에게 많은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로마인과 원로원에게 감찰관 직책이 갖는 의미와 역할을 보여준 인물, 언행일치된 청렴하고 강인하고 절제된 인물로 평가받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발굴된 비문에 따르면, 본명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이다. 출신계급은 파트리키에 속한 로마시민권자로 비문에 따르면 "아피우스의 손자이며 가이우스의 아들" 이다. 출신지는 로마에서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일족의 거주 밀집지역인 아니오 강 유역의 구역이다. 그의 지파성씨로 알려진 카이쿠스(Caecus)는 노년기에 노환과 질병으로 시력을 거의 상실해 얻게 된 별칭이라고 한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공동무덤이 있던 곳[1]에서 발굴된 그의 비문에 따르면, 아버지 이름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다. 그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인레길렌시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인레길렌시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카이쿠스의 부친은 12표법의 원인을 제공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손자 혹은 종손으로 10인 위원회 아피우스와 별개의 인물인 부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조부뻘의 친척들인 아피우스, 가이우스, 마르쿠스의 행동으로 얻게 된 가문의 불명예를 씻고자 부단히 노력한 원로원 의원이다. 그는 기원전 337년 독재관에 임명됐는데, 반대파 사제에게 종교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의심된다는 누명을 뒤집어 쓴 뒤 반강제로 즉시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이름은 미상이나, 밑으로는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나는 동생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가 있다. 카이쿠스와 카우덱스의 관계가 동복형제라는 말도 있고, 이복형제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고대 로마인들이 10대 중반에 결혼해, 40대 초반까지 부부 사이에서 아이를 얻은 것을 볼때 이복형제로 단정짓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있다. 이에 관해 아울루스 겔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로 대표된 로마시대 역사가들은 두 사람이 형제였다고 분명히 기술 중이다. 카이쿠스의 동생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형 카이쿠스의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가 집정관이 되고 4년 뒤에야 집정관에 올랐고, 제1차 포에니 전쟁과 연관된 인물로 유명하다.
2.2. 젊은 시절과 초기 경력
비문에 따르면, 카이쿠스가 감찰관에 오르기 전 여러 하급 직위를 거쳐 단계를 밞아 감찰관에 취임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포로 로마노에서 가진 추도사에서 나오는데, 여기에 따르면 그는 민회 선거를 통해 뽑힌 대대장 3번을 비롯해 재무관, 안찰관 등을 거쳐 공화국 내 하급 행정관 직을 두루 체험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직책 경력은 과거 로마 파트리키, 노빌레스 출신 엘리트들의 명예로운 경력, 승진 과정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카이쿠스는 감찰관에 오르기 전 여타 명문대가 출신들과 달리 대대장 직책 등을 여러 번 경험했다. 이는 대개의 파트리키, 노빌레스 출신들이 자신과 가문의 인기를 높이고자, 조영관 지위를 독점하면서 감찰관의 역할 일부를 편법적으로 행사한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카이쿠스는 이런 탄탄한 경력 아래 감찰관 취임 전까지 로마 공화국의 하급 행정관으로 실무를 맡았다. 이때 그가 명성을 쌓게 된 것은 3번의 대대장 선출과 이탈리아 통일전쟁 참전이었다. 이는 아마도 아버지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즉시사임하는 방식으로 탄핵된 이후 가문의 위세가 꺾인 배경 때문에 내린 결단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삶과 사상을 생각해보면, 그가 인기를 얻고자 이런 고생을 했을 확률은 떨어진다. 어쨌든 이런 경력 아래 카이쿠스는 대대장과 조영관 직을 역임하는 방식으로 실무를 쌓고, 제2차 삼니움 전쟁에서 군지휘관으로 참전했다.
2.3.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이 사람의 경력에서 가장 핵심이 된 것은 감찰관 경력이다. 그는 기원전 312년부터 기원전 307년까지 감찰관으로 있으면서 과거, 미래의 역대 감찰관들과 달리 여러 개혁을 입안하고 이를 직접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사비니족 출신으로 라티움, 오스카, 삼니움, 움브리아 색채가 짙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이래 공화정 시대 3대 명문 수준으로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이런 이유로 그는 혹자들에게 로마의 페리클레스로 평가받기도 한다.그가 재직하면서 가장 유명한 업적은 로마 최초의 포장도로인 아피아 가도, 수도교인 아피아 수도교 건설 및 관리, 감독 그리고 제2차 삼니움 전쟁 수행 과정에서 건의한, 라티움과 캄파니아 전역에 삼니움인과 에트루리아에 대한 공세를 막기 위해 요새화된 로마 식민도시을 건설하자는 주장이다. 이 공적은 도로, 수도교 건설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목적까지 고려된 의도가 강했다.
그렇지만 로마 시대 내내 그가 세운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시민권 확대, 귀화조건의 유연화, 평민 투표권 보장, 재판 변호권 보장, 고문 금지 같은 실질적인 평민, 하층민 지위 향상이었다. 이는 현대까지도 이 인물이 논란의 인물이 아니라, 개혁가, 대정치가로 평가받는 이유다. 하지만 당대에는 원로원 동료들에게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비난받고, 그와 클라우디우스 일족이 별종, 괴짜, 고집불통 등으로 비난받고 악평을 받은 이유가 됐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발생한 이탈리아 반도 출신 노예들의 해방노예 조건을 크게 완화하도록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 쉬워졌고, 그들이 자유를 얻으면 그 자녀들은 자동으로 로마시민권자가 되도록 하면서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영역 국가로 갈 기반을 닦게 된다. 이 개혁 외에도 그는 도시 교외와 농촌에 거주하는 평민과 그 가족들의 지위 보장, 농부와 어부들의 투표권이 보장받고 그들이 불합리한 일을 당할 때 법원에 출석해 변호권을 보장받도록 했다. 그는 이를 성문화하는데 힘쓰고, 로마인 모두에게 모스 마이오룸이 되도록 했다.
능력있는 해방노예의 후손들을 원로원에 추천하고, 쌩평민들에게 의석을 주도록 한 것도 아피우스였다. 카이쿠스는 감찰관으로 있으면서, 이탈리아인이나 해방된 이들의 후손들을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추천하고 임명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토지가 없는 시민을 트리부스(tribus)에 들게 했고,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에트루리아인, 사비니인, 삼니움인과의 전투를 치르자고 주장한 강경론자임에도, 통일 이후에는 같은 동포라며 이들의 권익 향상에 집중하자고 했다. 따라서 원로원 안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귀족들[2]은 이런 카이쿠스에게 관습과 전통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위엄과 자유를 침해한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건국 이래 대귀족 파벌을 이끈 파비우스 가문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엄격함과 공공이익을 위해 동료들을 희생시킨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여러 번에 걸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부자와 카이쿠스 동생 및 조카들을 축출하기 위해 없는 죄를 덮어 씌웠다. 이때 파비우스 가문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 동료 의원들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가리켜 "독재자를 꿈꾼다"라고 비방했다. 이를 주도한 파비우스 가문의 공격은 노골적이었다. 그래서 파비우스 픽토르[3]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오만하고 독선적인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 사람의 아들 혹은 손자인 로마 최초의 역사가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는 후대 로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자신의 저서에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면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문제 많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부패하고 부도덕한 선동가이며, 무능한 장군이다."
대개의 귀족들은 이런 비방에 못 이겨 스스로 철회하거나, 밀어 붙이다가 그 직책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후대에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명성을 크게 흠집낸 클라우디아,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네로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둘째 아들 풀케르처럼 무능하면서도 책임감만 강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 클라우디아처럼 사람이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직계 후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처럼 선동가도 아니었고, 네로처럼 구린 구석이 많고 문제 많은 괴짜도 아니었다. 되레 그는 기본적인 정신력이 대단히 강하고, 자신에게 비난이 쏟아지면 더 강하게 밀어 붙이면서 자신을 증명했다. 따라서 정적들은 카이쿠스의 사생활을 캐려고 했는데, 이마저도 카이쿠스가 부패, 무능, 부도덕함과 거리가 멀고, 자녀들 문제도 엄격해 모두 실패했다.
이렇게 되니 정적들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카이쿠스가 감찰관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동료 감찰관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여기에는 그의 동료 감찰관도 있었다. 카이쿠스의 동료 감찰관 플라우티우스는 불만을 표출했고, 급기야 아피우스를 몰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파비우스 가문 등과 함께 귀순 형태로 로마인이 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결함, 10인 위원회의 악명 높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떠올리는 일을 벌였다. 하지만 평민, 무산자, 농부, 어부 등의 대다수 로마인들과 해방노예 및 그 자녀, 정복지 자유민들은 그 선동에 편승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정치적 위기에도 탄핵은커녕 그 인기가 더 치솟게 된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부딪힌 이들이 그와 클라우디우스 일족 전체를 싸잡아 까내리자 감찰관 권한을 적극 활용했다. 파비우스 가문과 함께 손을 잡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악명을 언급해 씹어댄 포티티 가문의 특권을 박탈한 일이 이때였다. 이때 아피우스는 포티티 가문이 독점한 헤라클레스 신전 관장업무를 노예들이 하도록 했고, 업무 감찰과 함께 행정의 체계를 바로 잡았다. 이렇게 되자 포티티 가문은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그들은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몰락귀족 신분까지 위세를 추락한다. 당연히 이런 모습에 정적들은 아피우스가 노골적으로 신성모독을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들은 아피우스가 기어이 포티티 가문을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몰락귀족 신분까지 위세를 추락시켜 동료귀족들에게 더 크게 욕먹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자신의 개혁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선거 명단 조정 개혁을 밀어 붙였다. 물론, 이 조치는 귀족, 원로원 입장에서 볼 때 조작이었다. 특정가문의 선거구 독점을 막고 민회의 요구를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로마인 사이에서 그 평은 크게 갈렸다. 동료 귀족들 눈에 이는 상식과 관습에 어긋난 짓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이를 빌미로 그라쿠스 형제의 직계조상이 되는 호민관 셈프로니우스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다.
그래서 환멸을 느낀 플라우티우스는 여러 논란을 일으킨 아피우스를 몰락시키기 위해, 사임했다. 이는 관례상 한명이 사임하면 동료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이용해 귀족들이 벌인 계략이었다. 헌데 카이쿠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남은 18개월 임기를 채운 뒤 자기가 할 역할을 다 했다. 그는 부재 중인 동료를 다시 뽑지 않았고, 4년을 다 채우고 임기를 마쳤다. 그것도 임기를 꽉 채우면서, 마지막 날까지 원로원 안에서 감찰관으로 활동했고, 원로원 의원 명부를 손수 정리하고 관리해, 본인 이후의 감찰관들에게 참고될 선례까지 남겼다. 따라서 그가 많은 논란 끝에 임기를 채운 뒤 감찰관에서 물러났을 때, 로마인들은 카이쿠스를 논란의 인물이라고 평하면서도 그를 감찰관과 로마 귀족 정신의 표본으로 보면서, 카이쿠스가 한 조치를 떠올리며 이전까지 애매모호하면서도 하위 실무직 같았던 감찰관 직을 다시 평가했다.
하지만 논란 많고, 감찰관 임기 내내 끝없이 로마 건국부터 파트리키 중 권력을 쥔 가문들과 부딪혀, 카이쿠스와 그 일가의 악명 역시 높아졌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말년에 눈이 멀자, 이를 저주받았다고 여겼다.
2.4. 집정관 경력과 독재관 시절
그는 정치가이기 이전에 중하위 공무원과 실무직 하위관리자로 재직하면서, 법률 관행 방법과 소송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고 여러 법률 지침서와 공중도덕 및 예의범절에 관한 저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아피우스는 여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입으로만 떠들지 않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스스로 엄격하게 이를 지키고 가문과 가족원들에게도 검소하고 엄격한 삶과 언행일치된 생활을 교육시켰다. 더욱이 카이쿠스는 감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영달과 가문의 명성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평민들의 지위 향상과 해방노예 및 그 가족들의 지위 향상에 노력해 엄격하고 고지식하다는 평가 속에서도 공화정 시대의 꽃으로 불린 집정관 직과 독재관 경력을 쌓게 됐다.두 번의 집정관 직을 역임하고 기원전 285년 독재관에 취임한 이후, 그는 역대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 로마인 중 최고 거물이 됐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먹으면서 시력이 감퇴해 말년이 되면 거동이 불편해지고 거의 시력을 상실했다. 그런데 이 시기, 에페이로스 왕국의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피로스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가 보낸 사신 키네아스가 서한을 보냈다. 이때 원로원 안은 이에 관해 의견이 갈렸다. 그런데 그때 아피우스는 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네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원로원에 출석했다. 여기에서 그는 동료, 후배 원로원 의원들에게 로마는 절대 항복하면 안 된다며 호통을 친 뒤 다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짓는 존재다."
이라고 말했다.이 발언은 로마 원로원과 로마인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그래서 로마는 피로스와의 평화교섭 대신 전쟁 의지를 불태웠고 이는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과 패권국 성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키케로, 리비우스 등에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연설은 회자됐다.
2.5. 사망
기원전 271년 노환으로 사망했다.3. 가문과 후손
클라우디우스 일족은 귀족, 평민 지파 모두 논란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이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때까지 잡음을 끊임없이 일으켜도 상식적이고 절제적인 사람들로 세간에 알려졌다.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라는 사내와 그의 개혁, 업적은 당대 파트리키 동료 의원, 평민 출신 귀족들인 노빌레스 동료 의원들에게 조상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했다며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건국 이래 강력한 대귀족 가문으로 명성이 드높은 파비우스 가문과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그 일가를 상대로 "그들은 끝도 없이 정치, 사회적으로 불화를 일으킨다"고 강하게 몰아 붙였다. 이는 카이쿠스의 증조부와 그 친척들이 폐쇄적 귀족정을 꿈꾸고, 로마 시민권자를 노예로 삼고자 꾸민 악행의 전례로 큰 호응을 받았다.
그래서 카이쿠스의 후손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클라우디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당시, 반대파와 그 가문 사람들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만하다.", "부패하고 비양심적이다.", "선동적이고 이상하다.", "완고하고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 등으로 폄하했고, 이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나쁜 이미지를 뒤집어 쓴 이유가 됐다.
그러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그 가문, 후손들이 상당한 비방 속에서 속앓이를 했음에도, 명예와 업적을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카이쿠스의 결단력과 행동 모두 진심이었고 엄격함과 완고함 속에서도 그 책임감이 대단해 명예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능한 해군제독으로 사회적 질타를 받고 비극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역시 카이쿠스처럼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딸 클라우디아는 지나칠 정도로 경박하고 거만해,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폄하한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 어떻게 보면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명성에 흠집이 나게 된 것은 클라우디아의 무책임한 망언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카이쿠스의 형제자매들은 클라우디아가 역대급 실언을 하면서 거액의 벌금인 25,000 아세스을 문 이후에도 그녀를 감싸지 않았다.
그렇지만 풀케르 남매의 행보와 발언은 클라우디아가 천문학적인 벌금을 물게 된 직후,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파비우스 가문과 코르넬리우스 가문 주도로 완고하고 귀족적이며 평민에 대한 증오와 멸시가 대단한 일족의 이미지를 얻게 만들었다. 이는 포에니 전쟁이 종결된 뒤에도 계속 되었고, 잊혀질 만하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같은 선동정치가,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 나오면서 계속 회자됐다. 그래서 키케로 등 후대 로마인들은 이런 클라우디아의 망언과 실언이 기원전 249년 집정관인 해군제독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몰락과 맞물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업적과 인품,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의 명성에 큰 오점이 생겼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이끈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그 동생 코덱스, 및 카이쿠스의 네 아들, 아주 먼 친척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등의 노력 아래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파트리키, 플레브스 계급에 두루 퍼진 씨족 가문 중 후발후자임에도, 카이쿠스 생전부터 앙숙이 된 파비우스,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함께 공화정 시대의 3대 명문이 됐다.
카이쿠스의 네 아들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서로 다른 코그노멘을 사용하여 네 개의 분파 가문이 생겨났다. 장남인 루수스가 후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차남인 풀케르의 후손들이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종가격 지파이자 원류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켄토 가문은 가이우스의 손자 세대 이후 기록이 사라진다. 네로 가문은 공화정 말기까지 이어졌다가 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구성하며 로마 제국의 황실로 등극했다.
4. 여담
[1]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데, 카이쿠스의 네 아들 중 차남 푸블리우스를 중시조로 한 풀케르 가문, 삼남 가이우스를 중시조로 한 켄토 가문, 사남 티베리우스를 중시조로 한 네로 가문 사람들 역시 일부 매장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중 대다수는 확인 미상이나, 대개는 카이쿠스 일가의 선조, 후손들로 풀케르 가문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풀케르 가문은
아우구스투스의 딸로
티베리우스의 아내
대 율리아 성추문 당시 아우구스투스에게 누명을 쓰고 몰락한 이후에는 매장 흔적이 없고, 이후 후손들은 마르켈루스 극장 근처의 일반 공동묘지 등에 묻힌 것이 확인됐다.
[2]
특히 파비우스 가문 남성들과 그 친구들
[3]
로마 최초의 역사가로 불린,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픽토르라는 코그노멘은 기원전 306년경 로마의 여신 중 복지, 건강, 번영을 담당한 살루스를 모신 신전을 담당, 관리, 장식한 배경으로 얻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