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 라틴어: Lucius Caecilius Metellus Den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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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84년 |
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카니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동기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투카 |
후임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투카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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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그는 카이킬리우스 씨족에서 '메텔루스(Metellus)'라는 코그노멘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아버지는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84년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투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해에 켈트족 계열인 세노네스족이 침입하여 아레티움을 포위하고 그곳을 지키는 로마 총독을 살해했다. 메텔루스는 아레티움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성벽 아래의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7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 및 13,000명의 군인과 함께 전사했다. 이후 보결 집정관에 선임된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는 세노네스족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을 벌이려 했지만, 그들이 사절을 죽이자 즉시 전투를 벌여 승리한 후 세노네스 족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한 뒤 식민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이 사건은 기원전 283년에 일어났고,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는 법무관의 자격으로 메텔루스의 뒤를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법무관이 군사권을 가진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부터라며 오로시우스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본다.
기원전 251년과 기원전 247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그의 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