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라틴어: Marcus Atilius Regu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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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고대 카르타고 카르타고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조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아버지) 마르키아(부인)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장남)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차남)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
동기 | 루키우스 율리우스 리보 |
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
임기 | 기원전 256년 |
전임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
동기 |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
후임 |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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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레굴루스 가문은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아틸리우스 씨족 내 평민 지파로, 기원전 335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칼레누스가 집정관을 역임한 이래 고위 행정관에 잇따라 이름을 내걸면서 로마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루키우스,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기원전 257년과 기원전 250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가 그의 형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의 조부가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기원전 267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리보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된 그는 에페이로스 왕국의 국왕 피로스 1세가 로마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뒤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복종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아풀리아로 진군해 삼니움족을 격파하고 브룬디시움을 공략하고 뒤이어 피케니를 정복한 뒤 그곳의 일부 주민들을 살레르노에 재정착시켰다. 이후 로마로 돌아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56년 집정관으로 막 선임된 퀸투스 카이디키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 동료 집정관은 파트리키 신분인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였다. 그는 지금까지 건조한 모든 전함을 끌어모아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하자고 주장했다. 원로원과 민중은 삼니움 족을 무찌르고 브룬디시움 공략에 성공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춘 그라면 카르타고를 굴복시켜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 믿고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에 대한 임페리움을 확보한 레굴루스는 동료 집정관 불소와 함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흩어졌던 함대들에게 에크로무스 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에크노무스 항에 집결한 지상군은 40,000명, 함대는 330척에 달했다.
카르타고 해군은 로마군이 아프리카로 쳐들어오려 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에크노무스 곶에 350척에 달하는 함대를 집결시켜서 적이 바다로 떠나는 것을 저지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두 집정관은 적이 뛰어난 기동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함대를 쐐기 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기로 했다. 이에 카르타고 지휘관 하밀카르와 한노는 위장된 후퇴로 적의 전투 진형을 무너뜨린 뒤 4개 로마 편대 중 후방에 뒤쳐진 2개 편대를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가까이 오는 적 함선에 코르부스를 내리 꽂아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적선에 승선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한편, 레굴루스와 불소가 이끄는 선두 편대는 후퇴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많은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포획했다. 그러던 중 후방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채고 추격을 중단한 뒤 뱃머리를 돌려 아군 함대를 공격하고 있는 적 함대의 배후를 찔렀다. 불소는 해안 근처에 좌초될 위기에 몰린 3번째 편대를 구했고, 레굴루스는 4번째 편대를 구조했다. 이에 하밀카르와 한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24척을 잃고 적선 30척을 격침시키고 64척을 나포한 두 집정관은 손상된 함선들을 수리한 뒤 아프리카로 항해해 클루페아 해안에 상륙한 뒤 아스피스 시를 포위 공격해 며칠 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인근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막대한 전리품과 27,000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이후 겨울이 다가오자 원로원에 전령을 보내 향후 지침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원로원은 불소에게 대다수 전선과 다수의 육군을 시칠리아로 돌려보내고 레굴루스는 15,000 보병과 500 기병과 함께 현지에 남아서 점령지를 지키면서 현지 보급에 힘쓰라고 지시했다. 이는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아프리카에 주둔한 수만 병력에 물자를 지속적으로 보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소는 지시에 따라 시칠리아로 돌아갔지만, 레굴루스는 얌전히 점령지를 지키고 있을 생각따위 없었다. 그는 내년에 부임할 집정관에게 임페리움을 넘기느니 자기 선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굴복시켜서 군사적 위업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에서 남동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아디스(현재 유티나) 시로 진격해 포위하고 주변의 시골을 약탈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하밀카르, 하스드루발, 보스타르에게 적군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하밀카르가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로 이끌고 온 5,000 보병과 500 기병을 포함해 로마군과 비슷한 전력을 규합한 뒤 아디스로 진군했다. 이후 아디스 인근의 바위 언덕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레굴루스는 적이 아군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주둔한 것을 보고 병력을 둘로 나눠서 새벽에 기습 공격했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은 적이 기습하러 온 것을 사전에 눈치채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적진에 먼저 도착한 첫번째 로마 부대는 카르타고군의 맹렬한 저항에 고전하다가 언덕 아래로 밀렸다. 그러나 카르타고군 상당수가 밀려나는 적을 쫓느라 전열을 이탈해 버렸고, 레굴루스는 2번째 부대를 이끌고 그런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했다. 이에 카르타고군은 언덕에서 퇴각했고, 기병대와 전투 코끼리는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투입되지 않다가 퇴각했다. 로마 측의 기병은 고작 500명밖에 안 됐기에 섣불리 추격하지 않았고, 로마 보병들도 전투를 온종일 치르느라 지쳐서 퇴각하는 적을 쫓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적이 버리고 간 진영에 가서 마음껏 약탈했다.
아디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주변 지역을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던 부족과 도시들이 이 때를 틈타 카르타고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카르타고 시내에 레굴루스를 피해 도망쳐 온 난민들로 북적였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는 승산이 없다고 본 카르타고 정부는 레굴루스에게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다. 만약 레굴루스가 카르타고가 받아들일 만큼 온건한 조건을 제시했다면,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이때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본 레굴루스는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로마에 넘긴다.
2. 카르타고는 로마가 지금까지 치른 모든 전쟁 비용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3. 카르타고는 로마에 매년 경의를 표해야 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가 없이 이웃 국가와 전쟁을 선포하거나 동맹을 맺을 수 없다.
5. 카르타고는 전선 1척 외에 함선을 갖출 수 없으며, 로마가 새로운 전쟁을 벌일 때 50척의 전선을 제공한다.
2. 카르타고는 로마가 지금까지 치른 모든 전쟁 비용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3. 카르타고는 로마에 매년 경의를 표해야 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가 없이 이웃 국가와 전쟁을 선포하거나 동맹을 맺을 수 없다.
5. 카르타고는 전선 1척 외에 함선을 갖출 수 없으며, 로마가 새로운 전쟁을 벌일 때 50척의 전선을 제공한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요구를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고 여기고 최후의 항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당시 그리스에서 온 대규모 신병들이 카르타고에 도착했는데, 그들 중에는 스파르타 용병 지휘관인 크산티푸스가 있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 측의 병력과 기병, 전투 코끼리의 숫자를 점검한 뒤 동료들에게 "카르타고군은 충분히 로마군을 물리칠 전력을 갖췄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로마군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군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의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카르타고 정부는 크산티푸스를 소환했다. 크산티푸스는 자신에게 지휘권을 준다면 로마군을 물리쳐 주겠다고 약속했고, 어떻게든 로마군을 물리치고 싶었던 카르타고인들은 그를 믿어보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는 카르타고 당국이 처음부터 크산티푸스를 지휘관으로 초빙했다고 밝혔다.
크산티푸스는 겨울 동안 군대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조국을 멸망 위기로 몰아놓은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많은 카르타고인들은 처음에는 외국인이 최초로 자국군을 지휘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크산티푸스의 철저한 훈련 방식과 능수능란한 지휘력을 보고 그라면 로마군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명령에 복종했다. 이윽고 기원전 255년 봄이 오자 카르타고군이 카르타고 시에서 출발해 로마군을 향해 접근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보병 12,000명, 기병 4,000명, 코끼리 100마리의 전력을 갖췄다고 한다.
레굴루스 역시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카르타고를 재기불능으로 만들기로 마음먹고 출진했으나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좌측면에서 적 용병대를 패퇴시킨 2,000 로마 군단병 만이 전장을 빠져나와 아스피스 시로 퇴각했고, 레굴루스 외 장교들과 500명의 장병들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나머지는 모조리 살육되었다. 그 후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에서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호라티우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에우트로피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 후대 로마 작가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기원전 251년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많은 동포들이 로마군에 붙들리자, 카르타고 정부는 포로 교환을 협상하기 위해 사절을 로마로 보내기로 했다. 이때 레굴루스도 이 사절단과 함께 파견되었는데, 로마인들이 포로들을 석방하지 않을 경우 반드시 카르타고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이 주어졌다.
존 보이델, <카르타고로 돌아가는 레굴루스>, 1771년 작.
레굴루스는 로마에 도착한 뒤 "나는 푸닉인의 노예가 되었으니 로마 시민이라는 칭호를 가질 수 없다"라고 선언하고 로마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으며 심지어 아내와 아이들을 껴안는 것도 거부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밝히면서도 카르타고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주장했다.
"젊고 유망한 카르타고 포로들을 이 쓸모없는 노인과 교환하지 마시오!"
많은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로 돌아가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게 뻔하니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는 맹세를 한 이상 끝까지 지켜야 한다며 이를 거부하고 카르타고로 돌아갔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가 처형된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내부에 못이 박힌 나무 상자에 넣어져 심한 고통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고 한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카르탸고인들은 그를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둔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 그를 꺼내서 태양 광선에 직접 대고 하늘을 보도록 강요했으며, 그가 눈꺼풀을 내릴 수 없도록 위아래로 꿰맸다고 한다. 또한 레굴루스가 심한 고문을 받다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원로원은 카르타고 포로 2명을 레굴루스에게 가족에게 넘겼고, 그들은 포로들을 갈고리가 박힌 상자에 강제로 들어가 고통받게 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레굴루스의 눈꺼풀을 자른 뒤 작고 좁은 오두막에 가둬놓고 몹시 흥분한 코끼리를 풀어서 짓밟혀 죽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료를 제공한 폴리비오스의 <역사>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다. 또한 이 시기에 로마 포로와 카르타고 포로가 교환된 사례가 종종 있었다. 스키피오 아시나는 리파리 해전에서 사로잡힌 후 포로 교환 형식으로 로마로 돌아왔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기원전 249년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역시 아켈로스에서 생포된 뒤 기원전 247년 포로 교환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지만 로마로 돌아온 뒤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고 한다.[1] 이렇듯 고위급 장성들을 대상으로 포로 교환이 심심치 않게 이뤄지던 상황에서 레굴루스만 유독 심한 고문을 가한 뒤 살해할 이유는 없었다.
현대 학계에서는 로마인들이 자국의 패전 역사를 교훈을 주는 역사 이야기로 미화하고 레굴루스의 최후를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로는 그곳에서 정중한 대우를 받다가 자연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2]실제로 레굴루스는 후대 로마인들에게 약속을 죽음으로 지켜내고 비참한 상황에서도 조국만을 생각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테오도르 몸젠은 이에 대해 "진지하고 장식되지 않은 역사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불쾌한 반짝이"라고 평했다. 반면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레굴루스가 로마의 명예로운 평화를 거부하고 과도한 요구로 신들의 분노를 일으킨 어리석고 거만한 인간이며, 그 때문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그토록 길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비판했다.
레굴루스는 마르키아라는 여인과 결혼해 기원전 227년에 집정관을 맡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기원전 225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