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Scip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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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 ~ 기원전 211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베리아 일로르카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버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삼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형) 폼포니아(아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장남)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차남)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8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동기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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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한니발 바르카가 알프스산맥을 돌파하여 이탈리아에 들어온 뒤 로마군과 첫번째로 교전한 전투인 티키누스 전투의 상대 지휘관이었으며, 이후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와 함께 한니발의 본거지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맞서 싸워서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원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이다. 이 가문의 대표들은 대대로 집정관을 역임했다. 조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는 기원전 298년에 집정관을 역임하여 삼니움 전쟁 때 활약했으며,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기원전 259년 집정관을 맡아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인들을 코르시카 섬에서 몰아내기도 했다. 형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역시 기원전 22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문헌에서 확인된 푸블리우스의 첫번째 행적은 기원전 218년 평민 출신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함께 집정관이 된 것이다. 이 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첫 해였다. 스키피오는 추첨을 통해 마실리아를 경유하여 히스파니아로 진격해 한니발 바르카와 싸우게 되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가서 군대를 조직한 뒤 아프리카에 상륙하여 카르타고를 치기로 했다. 푸블리우스는 2개의 로마 군단과 14,000명의 동맹군 보병, 1,600명의 기병을 배정받고, 68척의 선박에 싣고 에트루리아와 리구리아 해안을 따라 출행했다. 이때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도 그와 함께 했다.
마실리아에 도착한 뒤, 그는 기병 몇 명을 파견하여 적의 행적을 조사하게 했다. 얼마 후 적 정찰병과 교전하고 돌아온 그들로부터 한니발이 이미 갈리아로 진입한 뒤 론 강에 접근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푸블리우스는 군대를 강 어귀에 상륙시킨 뒤 북쪽으로 진군하여 적군과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한니발은 그와의 교전을 회피하여 알프스 산맥으로 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푸블리우스는 형에게 군대를 맡겨 히스파니아에 그대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배를 타고 북이탈리아에 돌아간 뒤 루키우스 만리우스와 가이우스 아타리우스의 2개 군단을 통솔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그가 도착할 때쯤에 이미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 갈리아 부족들 중 일부를 복속시켜서 산맥을 넘을 때 입은 손실을 보충했다.
218년 11월, 양군은 파두스 강의 좌류인 티키누스 강 부근 평원에서 조우했다. 양 진영은 5마일 정도 떨어진 채 대치했는데, 사흘째 되던 날 한니발이 기병을 이끌고 나왔고 푸블리우스는 기병과 경무장 보병을 이끌고 출진했다. 양군은 곧 격돌하여 한동안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지만, 누미디아 기병대가 로마군의 후방에 파고들면서 전황이 기울었다.( 티키누스 전투) 푸블리우스는 전투 도중 중상을 입고 거의 죽을 뻔했다. 초기 문헌에 따르면, 어느 리구니아 노예가 그를 구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대에 대중의 인기를 끌은 문헌에 따르면, 당시 17살이었던 아들 스키피오가 자신의 말에 아버지를 태운 뒤 전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티키누스 강 너머로 퇴각했다가, 켈트족이 대거 로마에 반기를 들어 한니발과 가담하자 파두스 강 남쪽 기슭의 플라센티아로 퇴각했다. 한니발은 그를 따라 로마군과 매우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회전을 제안했지만, 푸블리우스는 거부했다. 그런데 그날 밤 로마군 진영에 있던 켈트족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로마군을 살해한 뒤 수급을 베어 한니발에 귀순했다. 이로 인해 사기가 급락하자, 그는 다시 트레비아 강 어귀로 철수했다. 이후 시칠리아에서 40일만에 달려온 동료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기누스와 합류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푸블리우스는 지금 당장은 적의 기세가 강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켈트족이 마음을 달리 먹고 이탈할 테니, 이번 겨울을 그대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셈프로니우스는 집정관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한니발과 어서 전투를 벌이고 싶어서 푸블리우스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두 장군은 진영을 분리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한니발이 보낸 약탈대를 로마 병사들이 성공적으로 격퇴한 일이 있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이를 계기로 한니발과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기원전 218년 12월 18일, 셈프로니우스는 푸블리우스의 반대를 무시하고 트레비아 전투를 감행했다가 참패했다. 당시 진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푸블리우스는 그날 밤 생존한 장병들을 수습한 뒤 크레모나로 철수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폴리비오스가 스키피오 가문을 드높이기 위해 일부러 스키피오의 동료 집정관이자 평민 출신인 그를 폄하하고 패배 원인을 그에게 몰아줬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트레비아 전투 때 그가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적과 교전한 것을 볼 때 중상을 입어서 전투가 불가능한 스키피오가 그에게 지휘권을 양도했으며, 회전을 벌이려는 그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사실 폴리비오스는 이후에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칸나이 전투 등 로마가 대패한 전투를 서술할 때 "성급한 평민 출신 집정관들이 신중한 귀족 집정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니발과 싸우려다 일을 그르쳤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이들 평민 집정관들이 귀족 집정관과 클리엔텔라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서술은 진실과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217년, 집정관 임기가 끝난 푸블리우스는 전임 집정관의 자격으로 8,000명의 군대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보내져 형 그나이우스와 합류했다. 이후 두 형제는 히스파니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포함한 카르타고 장성들과 대적했다. 두 형제는 먼저 사군툼을 급습하여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여러 부족의 인질을 확보한 뒤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수많은 히스파니아 부족들이 로마 쪽으로 넘어갔고, 형제는 이를 토대로 카르타고에 대적할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기원전 215년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한니발과 합류하려 하자, 형제는 한니발 하나만 해도 로마가 고통을 겪고 있는데 하스드루발까지 가세하면 나라가 망할 거라 확신하고 하스드루발의 진로를 차단했다. 양측은 곧 데르토사의 전투를 치렀는데, 히스파니아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은 이베리아인들이 전투 중 도주하는 바람에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는 이 덕분에 칸나이 전투에서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스키피오 형제는 이후에도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형제, 그리고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 대군을 상대로 우세한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누미디아 왕 중 한 명인 시팍스와 동맹을 맺고, 백인대장 퀸투스 스테테리우스를 시팍스에게 보내 누미디아 보병대를 로마 보병에 맞춰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이후의 공세 끝에, 두 형제는 기원전 212년에 카르타고의 주요 광산 마을인 카스툴로를 점령했다. 그러나 6년간 지속적인 공세 결과 확보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병력이 분산되었다. 이에 그해 겨울에 20,000명의 켈티베리아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병력을 충원하였다. 이후 푸블리우스는 로마군 2/3을 이끌고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상대하였고, 그나이우스는 1/3의 로마군과 용병대를 이끌고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상대했다.
그러나 곧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나이우스와 상대하게 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베리아의 족장 인디빌리스와 만도니우스에게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카스툴로에 주둔한 마고의 군대를 지원토록 지시하는 한편, 진지를 요새화하면서 그나이우스 휘하에 있는 용병들을 회유했다. 용병들은 막대한 돈을 주겠다는 말에 넘어가 그나이우스의 군대에서 대놓고 이탈했다. 로마군은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무력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켈티베리아인들은 고향에서 전쟁이 나서 집에 간다고 둘러대고 그대로 진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나이우스는 한순간에 전력이 급락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한편, 푸블리우스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의 유격전에 시달렸다. 로마인이 물을 긷거나 공사를 하러 캠프 밖에 나가면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한밤중에도 기습하여 큰 소동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군은 극심한 피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중 이베리아 족장 인디빌리스가 7,500명의 이베리아군을 이끌고 마고 바르카에게 합류한다는 소문을 접했다. 이에 푸블리우스는 그들이 합류하기 전에 급습하기로 하고, 2천 명의 병사를 티베리우스 폰티우스에게 맡겨 진영 수비를 담당하게 한 뒤 전 병력을 이끌고 인디발리스를 추격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행군한 로마군은 인디빌리스의 군대를 따라잡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런데 전투 도중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들이닥쳐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였고, 로마군은 이로 인해 큰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면서,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푸블리우스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고자 사활을 걸고 싸우다가 한 기병이 내지른 창에 찔러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가 죽자 로마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고, 적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을 자행했다. 그 후 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마시니사는 재빨리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합세하여 그나이우스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나이우스 역시 크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7년간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않고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승장구했던 스키피오 형제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였고, 로마군 8천 명만이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에브로강 북쪽에 집결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이들을 섬멸하려 하지 않았고, 211년 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이끄는 1만 명이 8천 패잔병과 합류했을 때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210년 푸블리우스의 아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1만 명의 추가 병력을 이끌고 이들과 합세했다. 그는 곧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이베리아 정복을 완수하고, 더 나아가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면서 보결 집정관으로 발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