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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18년 11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기병대와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로마 기병대 및 벨리테스가 맞붙은 전투.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군과 맞붙은 첫번째 전투이다.
2. 배경
기원전 218년, 로마는 9개월간의 사군툼 공방전을 치른 끝에 로마의 '친구'를 자처하던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한니발 바르카를 인도할 것을 카르타고 원로원에 요구했다. 그들이 단호히 거부하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했다. 한니발은 선전포고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우선 피레네 산맥의 원주민들을 제압한 뒤, 11,000명의 병력을 한노에게 맡겨 피레네 산맥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3만 8천 보병, 8천 기병,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발했다. 한편, 로마는 전쟁을 선포한 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2개 군단(보병 8,000명, 기병 600명)과 비슷한 수의 동맹군 보병 및 기병을 맡겨 시칠리아로 파견한 뒤 여차하면 아프리카를 치게 했다. 또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같은 수의 병력을 맡겨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푸블리우스는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부관으로 삼고 마실리아를 경유한 뒤 이베리아로 진군하기로 했다.한니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은 뒤 여러 켈트 부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그들을 칠 의사가 없으며, 어디까지나 로마를 공격하러 가고자 할 뿐이니 막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상당한 자금을 '선물'로 줬다. 이보다 앞서, 로마 원로원은 켈트인들에게 사절단을 보내 카르타고인의 진군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켈트인들은 "로마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게 뭔데 이런 부탁을 함부로 하는가?"라고 비웃으며 거부하였고, 카르타고인들이 건넨 막대한 자금을 보고 기꺼이 길을 열어줬다. 그 덕분에 여유롭게 진군할 수 있었지만, 9월 볼카이 족의 영토인 론 강 강둑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볼카이 족은 자기들 영토를 지나가려는 카르타고군을 적대해 모든 배를 강 반대편으로 끌고 가서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적이 건널만한 여울을 틀어박았다. 이에 한니발은 론 강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친 뒤 강을 도하했다.
한편, 마실리아에 도착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이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하고자 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곧 한니발의 정찰대와 조우하여 짧은 교전을 벌인 뒤 돌아가서 본대에 보고했다. 스키피오는 즉시 한니발과 맞붙기 위해 북상했지만, 한니발은 그와 교전하지 않고 알프스 산맥을 향해 진격했다. 스키피오는 곧 버려진 적진을 발견한 뒤, 더 추격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마실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한니발의 의도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것임을 깨닫고, 형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군대를 맡겨 이베리아로 파견하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병력을 새로 소집한 뒤 한니발을 저지하기로 했다.
그 후 한니발은 겨울에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하였고, 27일 동안 악전고투한 끝에 알프스를 기어이 넘었다.[1](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 그러나 그 과정에서 3만 8천 보병 중 2만 명, 8천 기병 중 6천 명만 살아남았고, 다수의 코끼리도 사망했다. 그는 기진맥진한 군대에 장기간 휴식을 주면서, 로마의 거듭된 침략과 착취에 이를 갈고 있던 북이탈리아의 켈트인들을 모집하여 병력을 보충했다. 그러나 모든 켈트족이 그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었고, 타우리니족은 한니발의 동맹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한니발은 켈트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타우리니족의 주요 정착지를 공격하여 저항하는 자들을 살육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노예로 팔았다. 그렇지만 켈트인들이 그의 병력이 적은 걸 보고 가담을 망설였기 때문에, 그는 로마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길 희망했다.
한편,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군대를 소집한 후 포 강을 건너 한니발을 찾아 나섰다. 그는 식민도시인 피아첸차의 카스트라 평원에 진을 쳤다. 이곳은 포강의 오른쪽 강둑에 있었고, 왼쪽 강둑에 접근하려면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그는 포 강의 지류인 티키누스 강 위에 다리를 건설한 뒤, 다리를 건너 인수브레스 족의 영역인 빅투물라에(오늘날 비게바노)에서 5마일 떨어진 평원에 또다른 진영을 세웠다. 당시 그는 12,000명의 보병, 수천 명의 라틴 연합 보병을 지휘했으며, 로마 기병대 1,000명, 로마 연합군 기병 1,000명, 갈리아 기병 2,000명으로 총 4,000명의 기병을 보유했다. 한편, 한니발은 포 강 상류에 진영을 세웠다. 그는 정찰대를 통해 적군의 위치를 확인하고, 즉시 강을 도하한 뒤 로마군 맞은편에 진영을 세웠다. 다음날, 한니발이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하고 스키피오도 응하면서 양측간의 기병전이 벌어졌다.
3. 전개
당시 한니발에게는 6,000명의 이베리아 및 누미디아 기병대가 있었는데, 이날 기병대 대부분이 전투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스키피오는 4,000명의 기병대에 4,000명 가량의 벨리테스(투창병)를 동원했다. 양군은 서로 관찰할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한 뒤 전투 대열을 편성했다. 한니발은 중무장한 이베리아 기병대를 중앙에 배치했고, 가볍게 빠르게 움직이는 누미디아 기병대를 양익에 배치했다. 한편, 스키피오는 갈리아 기병대를 전방에 세워서 적에게 도발한 후 후방으로 후퇴하고, 후위에 있는 로마 기병대가 적에게 달려들어 타격을 입히고, 최후방에 있는 벨리테스가 뒤따라와서 아군 기병대를 지원하는 전술을 구상했다.이렇게 양측의 작전이 세워진 뒤, 양측 기병대가 진격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갈리아 기병대는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진격해오는 이베리아 기병대를 향해 창을 던진 뒤 일제히 후퇴했다. 이후 로마 벨리테스가 투창을 던지기 위해 다가오자, 한니발은 그들이 창을 던질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로마 기병대에게 신속하게 달려들게 했다. 이와 동시에, 누미디아 기병대는 적의 양측면을 돌파한 뒤 벨리테스 부대를 강타했다. 벨리테스들은 적의 신속한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내 패주했다. 벨리테스들을 쫓아낸 뒤, 누미디아 기병대는 한창 이베리아 기병대와 격돌하고 있던 로마 기병대의 후위를 강타했다. 이리하여 로마군은 포위되었고, 스키피오는 중상을 입고 거의 죽을 뻔했다.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안티파테르에 따르면, 리구리아 노예가 중상을 입은 집정관을 구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17세였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버지를 구출했다고 한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의 동지였던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의 증언으로 이 일을 알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로마인들은 노예가 구조했다는 것보다 집정관의 아들이자 훗날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과 맞붙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구했다는 이야기를 훨씬 좋아했기에, 후대에는 폴리비오스의 기록만 각광받았다.
4. 결과
티키누스 전투 때 양측의 사상자가 어땠는지는 기록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전투 전개를 봤을 때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미미했지만 로마군의 피해는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키피오는 진영으로 가까스로 돌아온 뒤, 한니발이 다음날 전군을 이끌고 와서 로마군 진영을 포위하려 들 걸 우려해 그날 밤에 다리를 건너 티키누스 강 너머에서 한니발과 대치했다. 그러다 켈트족이 대거 로마에 반기를 들어 한니발과 가담하자, 파두스 강 남쪽 기슭의 플라켄티아로 이동했다.한니발은 그를 따라 로마군과 매우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회전을 제안했지만, 푸블리우스는 거부했다. 그런데 그날 밤 로마군 진영에 있던 켈트족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로마군을 살해한 뒤 수급을 베어 한니발에 귀순했다. 이로 인해 사기가 급락하자, 그는 다시 트레비아 강 어귀로 철수했다. 이후 시칠리아에서 40일만에 달려온 동료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합류했다. 이후 양측은 기원전 218년 겨울 트레비아 전투를 치른다.
[1]
정상에 도착하는데 9일, 정상에서 사흘간 휴식, 하산하는데 15일이 걸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