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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5 13:25:27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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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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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17년 9월,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로마군이 전개한 포위망을 돌파한 전투.

2. 배경

기원전 217년 6월, 고대 로마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기원전 218년 티키누스 전투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연이어 패한 데 이어, 이 해에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고 로마군이 궤멸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또다른 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파견한 4천 기병대는 움브리아에서 마하르발이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대의 습격으로 전멸했다. 결국 원로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를 기병대장에 선임했다.

파비우스는 독재관에 선임된 뒤, 세르비우스 성벽을 수리하고 신들에게 로마를 지켜달라고 기원하는 제사를 벌여서 시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또한 미누키우스에게 2개의 로마 군단과 2개의 라틴 동맹군, 그리고 보조 기병부대를 모집하는 역할을 맡겼으며, 라틴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성벽이 없는 마을을 포기하고 수비하기 용이한 요새로 주민들을 피신시켜라. 그리고 모든 농경지를 갈아엎고 우물에 독을 타고 온 마을에 불을 질러서, 적이 어떤 것도 얻지 못하게 하라."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한니발이 로마를 향해 진군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자, 파비우스는 세르빌리우스의 군대에 라틴움으로 가서 켈트족의 남하를 저지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미누키우스가 새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의 뒤를 쫓았다.

한편,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를 치른 뒤 군대를 며칠간 휴식시킨 후 캄파니아 일대를 약탈한 뒤 유유히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다가 아르피 부근에서 파비우스 휘하의 로마군이 따라잡아 6마일 떨어진 아이카에에 진을 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파비우스의 진영 가까이 와서 회전을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파비우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파비우스는 훗날 파비우스 전략으로 널리 알려질 전술을 단행했다. 그는 한니발의 뒤를 계속 따라가면서 고지를 선점하면서도, 한니발이 어떤 종류의 도발을 하든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분견대를 종종 파견하여 물자를 모으려는 한니발의 병사들을 습격했다. 또, 한니발의 진군로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안전한 성채로 이동시켰으며, 카르타고군이 미처 파괴하지 않은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더라도 절대로 구원하지 않았고, 한니발이 성채를 포위해도 견제만 할 뿐 직접적인 교전을 하지 않았다.

한니발이 서쪽으로 진군하여 삼나움을 거쳐 베네벤토로 이동해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했지만, 로마군은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갈 뿐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베누시아 시를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던 중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자신의 편에 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푸아로 이동하고자 했다. 그는 안내인에게 카푸아로 진군할 때 거쳐야 하는 카누시움으로 자신들을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안내인이 페니키아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카누시움이 아닌 카실리눔으로 안내해 버렸다. 한니발은 카실리눔 남쪽의 비옥한 평원인 아게르 팔레르누스에 자리를 잡고 여름 내내 주변 일대에 약탈 부대를 파견해 소, 곡물, 보급품, 포로를 확보했다.

파비우스는 이 때를 틈타 아게르 팔레르누스 주변의 모든 길목을 차단했다. 그는 먼저 카실리눔에 수비대를 증원하고 거기로 가는 다리를 봉쇄하게 했다. 또한 미누키우스에게 분견대를 맡겨 평원의 북쪽 길목에 진을 쳐서 라티나 가도와 아피아 가도를 모두 사수하게 했으며, 주력 부대를 미누키우스 분견대의 서쪽에 있는 마시쿠스 산 인근에 배치했다. 4,000명의 부대는 칼리쿨라 산을 지나 알리페 근처 평원의 동쪽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차단했으며, 평원 남쪽에도 각 부대가 길목을 틀어막았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아게르 팔레르누스 평원에서 모든 통로가 차단되어, 장차 말라죽을 위기에 몰렸다. 한니발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하여 안내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제 한니발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개 뿐이었다. 하나는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고 고지에 요새화된 로마군 진영과 정면 대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묘한 책략을 발휘해 적의 눈을 속이고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후자를 택하기로 마음먹고, 역사에 길이남을 작전을 구상했다.

3. 전개

전투 전날, 한니발은 부하들이 저녁을 든든히 먹게 한 후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자리에 일찍 들게 했다. 또한 사로잡은 2천 마리의 소를 선발하고, 하스드루발에게 보병과 경무장 보병 2천 명 더러 이들을 지키게 했다. 소의 뿔에는 마른 통나무와 나뭇가지가 횃불 형태로 묶여 있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5,000명의 포로를 처단해 사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료인 폴리비오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저서에는 포로 학살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하스드루발은 소떼를 몰아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다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자 소의 뿔에 묶인 나뭇더미에 불을 붙였다. 소떼는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면서 산악 지대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횃불 무리가 산지로 달려들자, 고갯길을 지키던 로마군 4,000명은 한니발이 정면 돌파를 꾀한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막으러 그곳으로 향했다. 한편, 로마군 본진에서는 부관들이 "한니발이 탈출을 시도하려 하니 당장 출격하여 저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파비우스는 야밤에 군대를 함부로 움직였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진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한니발은 고갯길을 지키던 로마군이 다른 데 관심이 쏠린 틈을 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조용히 진군해 고갯길을 빠져나갔다. 한편 소떼가 몰려간 산지로 이동한 로마군은 수많은 소들이 날뛰는 광경에 당황했다가,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적군과 교전했다. 날이 밝자, 한니발은 산악전에 능숙한 이베리아 부대 1,000명을 파견하여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곧 패주했고, 하스드루발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본대와 합세했다. 파비우스는 한참 후에야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인지하고 한니발의 뒤를 추격했으나, 한니발은 이미 멀찌감치 떠나 있었다.

4. 영향

파비우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매우 불안해졌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포위망을 세워놓고도 적이 유유히 빠져나가게 놔둔 그에 대한 불만을 터트렸고, 한니발 때문에 재산을 잃은 부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한니발은 다른 곳은 실컷 약탈하고도 파비우스의 영지를 일부러 놔두었고, 이 때문에 파비우스가 한니발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파비우스는 로마로 가서 자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한편, 파비우스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던 기병대장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을 쫓아가다가 게로니움에 숙영지를 세운 한니발과 소규모 접전을 벌여 승리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고 교전을 벌인 것에 분노하여 그를 처벌하려 했지만, "적을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둔 부하를 옹졸한 자존심 때문에 처벌하려 든다"라고 여긴 원로원이 막으면서 무산되었다. 여기에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등이 미누키우스에게 독재관의 권한을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한 게 관철되면서, 파비우스와 미누키우스는 동등한 군권을 갖고 각각 2개 군단을 맡게 되었다.

파비우스는 군대로 복귀한 뒤 미누키우스에게 한니발과 섣불리 싸우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미누키우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차후에 회전을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자 했다. 한니발은 그런 그의 심리를 읽고, 미누키우스를 유인해 게로니움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혔다. 파비우스가 구원해준 덕분에 전군이 몰살당하는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던 미누키우스는 이후로 파비우스의 뜻에 따랐지만, 로마 당국은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기를 연장하지 않기로 하고 파비우스 전략을 파기했다. 이후 새 집정관에 선임된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로마 역사상 최대 병력을 소집하여 한니발을 끝장내려 하지만,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