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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06년, 이베리아 반도의 수크로에서 로마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베리아 전선을 평정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뻔한 사건이다.2. 배경
기원전 206년 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일리파 전투에서 마고 바르카 -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모든 이베리아 부족들이 카르타고에 등을 돌리고, 두 카르타고 장성이 아프리카로 피신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카르타고 세력은 일소되었다. 스키피오는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신뢰하는 부관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누미디아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에게 가서 막대한 선물을 건네며 로마와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시팍스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이후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온 스키피오는 아직도 로마에 귀순하지 않은 일루지아와 카스탁스 시를 공략하기로 했다. 카스탁스와 일루지아 시는 쉽게 항복했고, 그는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에게 베티스 강에서 버티고 있는 아스타파를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갔다. 그러나 셉티미우스가 아스타파에 도착하기 직전에, 아스타파 시민들은 모든 재산을 파괴하고 집단 자살했다. 그 후 스키피오는 셉티미우스에게 카르타고의 마지막 이베리아 요새인 하데스를 육로로 공격하게 했고, 라일리우스에게 7척의 삼단노선과 1척의 대형 겔리선을 이끌고 해상에서 공격하게 했다. 한편, 그는 에브로 강 북쪽의 기지에 3,000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지중해 연안에 카르타고 함대의 접근을 감시하기 위해 8,000명의 병력을 주둔했다. 이제 카르타고 노바에는 스키피오와 7,000명의 병력, 그리고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수크로 기지에 주둔한 병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폴리비오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스키피오에게 호의적인 고대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기지에서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지 않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돈을 낭비했기에, 규율이 깨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 해에 일리파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고, 이후의 소탕 작전도 수행했기에, "오랜 기간 활동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모순된다. 그들의 불만은 스키피오가 약탈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은 데 있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을 시작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년간 작전을 수행하면서 이베리아 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이기 위해 온건 정책을 시행했다. 카르타고가 잡아뒀던 인질을 아무 대가 없이 풀어줬고, 그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권리를 존중했으며, 그들의 일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이베리아 주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약탈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 그에 대한 병사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그들은 오랜 기간 집을 떠나 머나먼 이베리아에서 힘겨운 전투를 연이어 치렀으니, 승자로서 마땅한 권리를 챙겨야 하는데 스키피오가 막는다고 여겼다.
봉급이 몇 년이나 연체되면서 돈이 부족한 점도 이들의 불만을 부추겼다. 여기에 식량이 부족해서 처벌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야간에 진영을 이탈하여 시골로 가서 식량을 가져와야 하는 사정 역시 병사들이 스키피오에게 반감을 품은 원인이었다. 또한 수크로의 많은 병사들은 기원전 218년 또는 217년 이래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복무 기간이 11년 또는 12년에 달했다. 이제 카르타고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되었으니, 속히 제대하여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수크로의 군인들은 처음에는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사적인 모임에서 설득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트리부누스들이 요구를 들어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스키피오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려달라는 요청도 거부하자, 병사들의 반감은 증폭되었다. 병사들은 노골적으로 불복종했고, 급여와 보급품을 즉시 지급하고 제대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장교들은 순찰 중에 공격당했고, 규율은 무시당했으며, 장병들은 낮에 노골적으로 군영을 떠나 마을을 돌며 물자를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던 중 카르타고 노바에 있던 스키피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병사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스키피오가 자신들을 조기에 어찌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3. 전개
스키피오가 중병으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가이우스 아트리우스와 가이우스 알비우스 등 반란 주모자들은 집단 회의를 소집해, 스키피오를 여전히 따르기로 한 7명의 트리부누스들을 추방하고 새 트리부누스들을 선출하며, 스키피오의 통제를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스키피오가 사망하여 새 지휘관이 로마에서 부임할 때, 그와 협의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로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스키피오는 중병에 걸려 몸져 누워 있으며, 카르타고 노바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실라누스에게는 고작 7천 명 밖에 안되는 병력만 있고, 나머지 군대는 멀리 떨어진 하데스나 에브로 강 북쪽 기지에 있었다. 여기에 이베리아 부족장 인디발리스와 만도니우스가 스키피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반란을 일으켰으니, 수크로의 일을 신경쓸 여유가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스키피오 또는 스키피오의 후임자는 자신들을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타협하려 들리라 예상했다.스키피오는 수크로에서 추방되어 카르타고 노바로 도망친 7명의 트리부누스들로부터 반란 소식을 접했다. 당시 그에게는 7천 명의 병력만 있었고 이베리아 부족장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섣불리 진압하러 갈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7명의 트리부누스들을 다시 수크로로 돌려보내 병사들과 대화를 차분하게 나누도록 했다. 트리부누스들은 반란 행위에 대한 논의를 피하고, 가급적이면 평온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반란을 일으킨 장병들의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았다. 그들은 곧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가 반란군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의 여러 도시에 사절을 보내 반란군에게 필요한 돈과 보급품을 보내게 했다. 돈과 보급품이 충분히 모이자, 수크로의 반란군이 보낸 사절에게 이걸 보여주면서, 그들이 이를 수령할 날짜까지 정해줬다. 반란군은 이에 기뻐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걸 곧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반란군을 방심케 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카르타고 노바에서 7명의 투리부누스들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들에 관한 정보를 전해듣고, 이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먼저, 카르타고 노바에 주둔했던 7천 병사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인디발리스와 만도니우스를 공격하는 명분으로 이동하게 하고, 자신은 홀로 7명의 트리부누스와 호위병만 데리고 수크로로 향해, 반란군이 "병약한 스키피오 혼자서 우리를 맞이하러 오는구나"라고 여기고 완전히 방심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면서 7명의 트리부누스가 각각 다섯 명의 반란 주모자를 밝히게 한 후, 이들을 연회에 초대하게 했다. 가이우스 아트리우스, 가이우스 알비우스 등 35명의 반란 주모자들은 아무런 경계도 품지 않고 저녁 연회에 기꺼이 응했다가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 스키피오의 지시를 받은 트리부누스와 호위병들에게 체포된 뒤 족쇄에 채워진 채 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날 아침, 스키피오는 8천 명의 수크로 반란군을 한 자리에 소집시켰다. 그들은 중병에 걸렸다던 스키피오가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크게 놀라며, 그제야 중병에 걸렸다는 게 헛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 이베리아 부족들을 토벌하러 간다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이끄는 7천 장병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이들을 에워쌌다. 실은 극비리에 방향을 틀어 수크로 주변에 매복한 것이었다. 주모자들이 모조리 체포된 데다 스키피오에게 여전한 충성을 바치는 장병들이 검으로 방패를 내리치며 위협하자, 반란군은 겁에 질렸다. 스키피오는 그들이 공포에 떠는 가운데 35명의 주모자들을 일일이 끌어내어 몽둥이 세례를 받게 한 뒤 기둥에 묶은 채 참수형에 처했다.
그 후 스키피오는 자신이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이베리아를 정복해 모두에게 영광을 안겨줬거늘 반란을 일으킨 그들을 질책하면서, 밀린 급료를 주겠지만 그 전에 군대의 휘장을 도끼로 모조리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스키피오에게 압도당한 반란군 장병들은 충성을 재차 맹세했고, 스키피오는 더 이상의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이후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이베리아 부족장들을 토벌하러 출진하자, 인디발리스와 만도니우스는 잘못된 정보만 믿고 경솔하게 행동한 점을 사과하면서 귀순했다. 스키피오는 이번에도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