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 라틴어: Lucius Marcius Septim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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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셉티미우스(아버지)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트리부누스 밀리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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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에퀴테스이자 장군. 베티스 고지의 전투로 인해 전멸의 위기에 직면한 이베리아 방면 로마군을 구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2. 생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로마의 에퀴테스 신분이었던 셉티미우스의 아들이며, 정신과 재치 모두 에퀴테스 계급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복무하면서, 이베리아 전선에서 카르타고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던 기원전 211년,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형제가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계략과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대의 분전으로 각개 격파당하고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흩어진 장병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서 수습한 뒤, 장교 티베리우스 폰테이우스와 합류했다. 두 사람은 에브로 강 북쪽으로 후퇴하여 진영을 요새화하고 보급품을 수습했다. 이후 남은 전력을 세어보니 8천 명만 남아 있었다.그 후 열린 군사회의에서, 로마군은 만장일치로 그를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얼마 후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군대가 접근해오자, 그는 정찰대를 보내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하였다. 당시 카르타고군은 적 지휘관들을 전부 해치웠으니 로마군이 지리멸렬해졌으리라 여기고 무질서하게 행진했다. 이걸 확인한 그는 장병들을 이끌고 요격하였다. 적이 뜻밖에도 조직적으로 공격해오자, 카르타고군은 깜짝 놀라 물러났다. 로마군은 경애하는 지휘관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거세게 몰아붙였고, 결국 카르타고군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르키우스가 추격 중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거나 장병들이 너무 멀리 쫓아갔다가 위험에 처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뒤이어 정찰병을 보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세운 진영을 살펴보게 해, 적진의 경계가 허술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의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그날 밤 야습을 감행했다. 이미 사기가 꺾인 카르타고군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패주했고, 로마군은 적진을 점거한 뒤 물자를 전부 챙겨서 에브로 강 건너편의 본영으로 가져갔다.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의심하지만, 카르타고군이 이후로 수적으로 적을 압도함에도 불구하고 에브로 강 건너편의 로마군을 섬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원로원에 승리 소식을 전하면서, 스스로를 '원로원 의원'이라고 칭했다. 원로원은 그가 어려운 상황에서 큰 일을 해냈다는 걸 인정했지만, 최전선의 장병들이 중앙의 동의 없이 하급 장교를 최고 지휘관으로 선출하는 걸 위험한 선례라고 여겼다. 이에 그를 대체할 새 지휘관을 보내기로 하고, 처음에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보냈다가, 네로가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계곡에 몰아놓고도 거짓 항복 약속에 속아넘어가 놓쳐버리는 실책을 저지르자 다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지휘관으로 보냈다. 그는 스키피오의 휘하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 때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함께 로마군의 측면 중 하나를 지휘하여 적의 측면을 압도해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스키피오가 누미디아로 가서 시팍스 왕과 협상할 때 타라코나에 남아서 군대를 대신 이끌었고, 스키피오가 돌아온 뒤 3분의 1의 병력을 이끌고 카스톨론을 포위했다. 하지만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고, 스키피오 본인이 직접 공세를 이끈 뒤에야 함락되었다.
이후 베티스 남쪽 일대를 로마의 영역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군사 원정을 떠나 하데스에 자리잡은 마고 바르카와 대적했다. 하데스 주민들이 도시를 넘겨주려 하자 이에 따라 진군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이베리아군 4천 명을 물리쳤지만, 마고가 주민들의 반역을 눈치챘다는 걸 알게 되자 후퇴했다. 이후 스키피오의 하데스 원정에 가담하여 카르타고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떠나게 하는 데 일조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기원전 206년 말 스키피오가 이베리아 반도를 떠났을 때, 그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함께 이 지역의 임시 사령관 중 한 명으로 남겨졌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