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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07년,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이끄는 로마군이 맞붙은 전투.2. 전투 경과
기원전 208년,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상대로 벌인 바이쿨라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그는 형 한니발 바르카와 합류하기로 마음먹고, 3만 명의 병력을 수습한 뒤 이탈리아로 출진했다. 그는 진군 도중에 갈리아 부족민들을 용병으로 추가 고용하면서, 총 5만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다. 동생이 자신과 합류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한니발은 적절한 시기에 브루티움에서 출진하여 동생과 합류하고자 했다.한편, 로마에서는 하스드루발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집정관을 선출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엔 집정관을 맡을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에서 전후수습을 해야 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고령의 나이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더이상 군대를 이끌기 어려웠으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등은 전사했다. 일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무난하게 기원전 207년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두번째 집정관으로 삼을 인물이 정해지지 않았다.
이에 원로원은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정계에서 강제 은퇴당한 뒤 오랫동안 잊혀졌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집정관에 출마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에 따라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었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로원이 서로 힘을 합쳐 적에 대항하여 행동할 것을 촉구하자,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일단 협력하기로 맹세했다. 그리하여 어렵게 정해진 집정관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임무를 배정받았다. 네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고, 리비우스는 하스드루발을 막기로 했다.
10년간의 전쟁 동안 시민 수가 27만에서 13만 7천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병력을 모집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네로는 징병 대상 나이를 낮추고 퇴역 장병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죄수를 동원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병력을 끌어모은 뒤 브루티움에서 루카니아로 북상한 한니발과 상대했다. 당시 한니발은 로마에게 굴복한 그루멘툼 시를 재 탈환하고자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네로는 인근 언덕에 숙영지를 세운 뒤, 한니발과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네로는 언덕 뒤에 일부 코호트를 숨겨놓고, 아침에 전면전을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양군이 곧 맞붙었고, 전투가 한창 무르익을 때 대대장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케르와 라틴 동맹군 지휘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한니발의 후미를 공격했다. 한니발은 즉시 후퇴하였고, 네로는 그를 추격해 많은 적을 죽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날 카르타고군은 8천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본다. 그 정도로 큰 손실을 입었으면 브루티움으로 철수했을 테지만, 한니발은 계속 북상했기 때문이다.
네로는 아풀리아에 도착한 한니발을 추격했고, 베누시아에서 따라잡아 소규모 접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한니발은 일단 남쪽으로 이동한 뒤 메타폰토스에서 군대를 징집한 후, 베누시아를 거쳐 카누시움으로 진군했다. 네로는 그의 뒤를 계속 추격하며 함부로 북상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러던 중 로마 정찰병들이 하스드루발이 형에게 보낸 전령을 사로잡았다. 네로는 페니키아어로 쓰여진 편지를 번역하여 하스드루발이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움브리아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병력이 5만에 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곧장 정예 보병 6,000명과 기병 1,000명을 이끌고 하스드루발과 상대하고 있는 살리나토르와 합세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하스드루발과 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