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Appius Claudius Pul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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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1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카푸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조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클라우디아(딸)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2년 |
전임 |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동기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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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한니발 바르카의 편을 든 카푸아를 공략하던 중 중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하지만 그의 아버지이기도 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1]
이렇듯 선대의 실책으로 위세와 명망이 꺾였지만, 그래도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무탈하게 여러 요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기원전 217년 최고 조영관을 역임하였으며,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 대대장으로 참여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카누시움에 패잔병들과 함께 있다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그들을 이끌 지휘관으로 선택되었다. 두 사람은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에게 연락을 취해 그곳에 와서 부대를 이끌게 했다.
기원전 215년 시칠리아 행정관이자 군사 사령관으로 발탁되었고, 보밀카르의 지휘하에 시칠리아에 상륙한 카르타고군을 물리치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히에로 2세가 노환으로 사망했고, 젊은 왕 히에로니무스가 한니발과 동맹을 맺자, 그는 사절을 보내 조부의 뜻을 받들어 로마와 우호 관계를 이어가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가 시칠리아 왕국이 히메라 강으로 확장하는 걸 동의하고 히에론 2세가 로마에 바쳤던 모든 공물을 돌려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바람에 설득에 실패했다. 이후 히에로니무스는 내부의 정쟁으로 살해되었지만, 시라쿠사는 카르타고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이에 원로원은 기원전 214년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시칠리아로 파견하였고, 그는 마르켈루스의 부하가 되어 기원전 213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풀케르는 육지에서 적을 상대했고, 마르켈루스는 해상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연이은 공세에도 아르키메데스가 설계한 요새와 기계의 활약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그해 말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고, 기원전 212년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플라쿠스와 함께 한니발의 이탈리아 동맹시 대표인 카푸아를 공략하고자 하였다. 로마군이 카푸아를 포위하여 공성을 벌이자, 한니발은 도시를 구하고자 그들을 공격했다.( 카푸아 공방전)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중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멀리서 나타났는데, 양측 모두 그들이 적군을 도우러 왔다고 여기고 전투를 중단했다. 이후 두 집정관은 한니발과 회전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그날 밤 카푸아를 떠났다. 그는 루카니아로 이동했고, 플라쿠스는 쿠마이로 이동했다. 그들은 한니발이 한 쪽을 추격하여 카푸아에서 떨어뜨린 뒤 다른 쪽 부대로 카푸아를 재포위하기로 했다.
한니발이 자신을 추격해오자, 그는 계속 후퇴하면서 한니발이 자신을 멀리까지 쫓아가게 유도했다. 이때 백인대장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가 1만 6천의 병력으로 한니발을 공격했다. 비록 그의 부대는 실라루스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섬멸되었지만, 그는 그 사이에 추격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었고, 플라쿠스는 카푸아를 예정대로 포위하여 포위망을 굳혀나갔다. 그 역시 나중에 카푸아로 돌아와서 주변에 3개 요새를 설치하고 해자와 성벽으로 도시를 에워쌌다.
기원전 211년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원로원은 그들의 지휘권을 이듬해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한니발은 다시 카푸아를 구하러 달려왔고, 두 집정관은 도시 수비대와 한니발의 양면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는 카푸아인과 맞섰고, 플라쿠스는 카르타고군과 맞섰다. 플라쿠스가 한니발의 맹공에 고전하면서도 버티는 사이, 그는 카푸아 수비대를 성문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적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왼쪽 어깨 아래에 창이 박히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한니발은 적군의 포위망을 풀게 하려고 로마로 진군해 위협을 가했지만, 로마 측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카푸아를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철수했다.
결국 카푸아는 오랜 공성 끝에 저항이 무익하다는 걸 깨닫고 항복했다. 로마군이 도시에 진입한 후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는 걸 지지한 53명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들의 처분을 원로원에게 맡기자고 주장했지만, 플라쿠스는 당장 처형하길 원했다. 그는 중상을 입은 상태라 플라쿠스의 강경한 입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53명의 인사들은 티아나와 칼라에서 처형되었다. 그 직후, 그는 부상이 악화하면서 사망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 아피우스, 푸블리우스, 가이우스가 있었는데, 모두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피우스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84년, 가이우스는 기원전 177년 맡았다. 또한 딸 클라우디아가 있었는데, 기원전 217년 카푸아의 행정관이었던 파쿠비우스 칼라비우스와 결혼했다. 칼라비우스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이후 한니발에게 항복하려는 시민들을 막았지만, 칸나이 전투 직후에는 항복했으며, 아들 페롤라가 한니발을 죽이려는 걸 만류했다.
[1]
클라우디아 재판 당시, 그녀가 천문학적인 벌금을 문 이유 중 하나는 친정식구들의 분노도 한몫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오빠가 한 행동을 거론하면서, 반성하고 있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 식구들을 더 욕먹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