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라틴어: Marcus Minucius Ru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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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6년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칸나이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미누키우스(조부) 가이우스 미누키우스(아버지)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1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
후임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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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이자 장군. 집정관과 기병장관을 역임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파비우스 전략에 정면 반대하다가 한니발 바르카에게 패배한 뒤 파비우스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노빌레스 집안인 미누키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21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들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질을 일삼는 이스트리아인과의 전쟁에서 군대를 통솔하였고, 이들을 로마에 예속시켰다. 기원전 217년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사하자, 원로원은 국가 위기사태를 선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했다. 이때 그는 기병장관에 선임되어 기병대를 이끌었다.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정면 대결하면 승산이 없으니 이를 회피하면서, 적의 뒤를 쫓아가면서 소규모 분견대를 물리치고 적의 전쟁 물자 수급을 훼방놓는, 이른바 소모전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수많은 반발을 야기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이 심각한 약탈을 일삼고 곳곳에 불을 지르는데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쫓아가기만 하는 그를 '굼벵이', '겁쟁이', '비겁자'라고 비난했다. 급기야 한니발을 카실리눔 평원에 가둬놓고도 그의 절묘한 계략에 속아넘어가 고스란히 빠져나가게 허용하는 일이 벌어지자(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 이러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또한, 한니발이 약탈할 때 파비우스의 영지를 건드리지 않자 파비우스는 국가의 책무보다 자신의 영토 보전에 신경쓴다는 대중의 의심을 받았다. 그 역시 독재관의 전술을 정면 비판하며, 공개적으로 게으름벵이이자 겁쟁이라고 모욕했다.
결국 파비우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일전의 실패를 해명해야 했고, 미누키우스가 그를 대신하여 군권을 이끌었다. 그는 한니발의 진영 근처에 바짝 군대를 이동시켰고, 한니발의 기병들이 주변 지역을 약탈할 때 이들을 공격하였으며, 이후 두 진영 사이의 언덕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우세함을 보여 한니발의 병사를 진영 내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로마인들은 열광했다. 로마 호민관 한 명이 파비우스가 독재관으로서 받은 임페리움(군권)을 그에게도 비슷하게 부여하는 법안을 민회에 내놓고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적극 찬성하면서 통과되었다. 이리하여 파비우스와 비슷한 권한을 갖게 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2개 군단을 이끌었다. 파비우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한니발과 섣불리 싸우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결국 무시했다.
얼마 후, 한니발은 미누키우스 진영 근처의 언덕을 밤중에 소규모 병력으로 점령했다. 다음날 아침 이 광경을 목격한 즉시 언덕을 탈환하고자 경보병과 기병대를 파견했다. 한니발이 자신의 병력을 추가 파견하자, 그는 모든 보병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런데 언덕 위의 카르타고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을 때, 언덕 아래에 매복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이 사방에서 공격했다.( 게로니움 전투) 이로 인해 참패를 면치 못했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때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파비우스가 그를 구하고자 출진하였고, 한니발은 온종일 전투를 치르느라 지친 군대로 새 적과 싸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본진으로 돌아온 뒤 파비우스를 찾아가 부복하면서 "나의 아버지여!"라고 외치며 앞으로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고, 파비우스도 그를 용서하고 다시 휘하에 맞이했다고 한다.
기원전 216년 새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휘하에 들어가 칸나이 전투에 참전했으나 끝내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