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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라틴어: Lucius Caecilius Mete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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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21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조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아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아들)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1년 |
전임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동기 |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 |
후임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
임기 | 기원전 247년 |
전임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동기 |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 |
후임 |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리키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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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독재관.2. 생애
라치오 인근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시를 건설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불카누스(Volcanus, 불의 신)의 아들 카이쿨루스의 후예로 전해지는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가이우스,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기원전 284년에 카이킬리우스 씨족 최초로 집정관에 오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한다.기원전 251년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기 이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두 집정관은 기원전 252년 카르타고 정부가 시칠리아의 요충지인 파노르무스를 탈환하기 위해 파견한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군과 대치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은 30,000명의 군인과 14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보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로마군과 섣불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로마군 역시 바그라다스 전투의 악몽 때문에 회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이렇듯 양군은 오랫동안 대치하기만 할 뿐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던 기원전 251년 늦여름, 하스드루발은 집정관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가 절반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이야말로 전투를 벌일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파노르무스를 향해 진군하며 로마와 동맹을 맺은 여러 도시로 군대를 보내 농장을 황폐화시켰다. 당시 시칠리아에 남아있던 메텔루스는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흩어졌던 병사들을 서둘러 집결시킨 뒤 파노르무스 성채로 후퇴했다. 적이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자, 하스드루발은 적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겠다고 확신하고 오레르토 계곡을 통과하며 여러 시골을 황폐화한 뒤 파노르무스 시 인근 해안가에 당도했다. 이후 병사들을 쉬게 해주는 대신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당시 로마군 장병들은 140마리나 되는 코끼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했다. 이에 메텔루스는 병사들을 성내에 대기시킨 뒤 투창병과 경보병 만을 성벽 앞 해자에 매복시켰다. 이윽고 적 코끼리 부대가 나타나자, 메텔루스는 코끼리들을 향해 투창을 퍼부으라고 명령했다. 투창 세례를 얻어맞은 코끼리들은 통제를 잃고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카르타고 보병대를 뚫고 도주했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이 혼란에 빠지자, 메텔루스는 즉시 군단병을 이끌고 적을 향해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카르타고군의 사상자는 전해지지 않으나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코끼리는 전투 첫날 10마리가 노획되었고 나머지도 나중에 노획되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사상자 역시 전하지 않으나 미미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스드루발은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본국으로 소환되어 처형되었다.
메텔루스는 로마에 귀환한 뒤 기원전 250년 9월 7일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노획한 코끼리들을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서 도살했다. 이후 코끼리는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상징으로 채택되었고, 이 가문의 구성원들은 공화국이 제정으로 바뀔 때까지 동전에 코끼리를 새겼다. 기원전 249년 독재관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휘하 기병장관으로 선임되어 시칠리아에서 활동했으나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으며, 기원전 247년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시칠리아의 로마군을 지휘했으나 역시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243년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가 사망한 뒤 그를 대신하여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242년 집정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로마를 떠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금지했다. 알비누스는 마르스 신의 플라멘(flamen)으로서 로마 시 내부에서 마르스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군대를 맡기 위해 신전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알비누스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참전하지 못했다.
기원전 241년 베스타 신전에 불이 나자 신전 내부로 들어가 그곳에 안장되어 있던 유물을 모두 챙겨 바깥으로 빼냈다. 일부 고대 학자들은 그가 이 과정에서 시력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동상을 회의장 앞에 세우고 마차를 타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224년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위 행정관 선거를 대신 이끌 임무를 부여받고 독재관에 선임되었다. 그 후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기원전 221년에 사망했다. 대 플리니우스는 < 박물지>에서 그의 아들이 대중에 발표한 그의 장례 연설문 일부를 인용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전사이자 훌륭한 연설가이자, 용감한 사령관이 되기 위해, 그의 지도 아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적 영예를 향휴하기 위해, 최고의 지혜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정직하게 많은 재산을 얻고. 많은 자녀를 남기고.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영광을 얻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기원전 206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이고, 둘째 아들은 기원전 213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이며, 셋째 아들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06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