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라틴어: Marcus Valerius Corv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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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371년 ~ 기원전 27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손자)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증손자)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48년 |
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인레길렌시스 |
동기 |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후임 |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
임기 | 기원전 346년 |
전임 |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
동기 |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 |
후임 |
마르쿠스 파비우스 도르수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루푸스 |
임기 | 기원전 343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
동기 |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
후임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
임기 | 기원전 335년 |
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카이소 두일리우스 |
동기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칼레누스 |
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
임기 | 기원전 300년 |
전임 | 독재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부스 |
동기 | 퀸투스 아풀레이우스 판사 |
후임 |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임기 | 기원전 299년 |
전임 |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동기 |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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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장군이자 정치인. 집정관을 6번 역임하면서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기원전 349년 켈트족의 침공에 맞서 싸운 집정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을 역임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키가 큰 켈트족 전사 하나가 결투를 벌이자고 요구했다. 이에 그는 집정관의 허락을 받고 출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결투 중에 발레리우스의 헬멧에 큰 까마귀가 앉았다가 켈트족 전사의 얼굴과 눈을 쪼아댔고, 발레리우스는 까마귀 때문에 괴로워하는 전사를 죽였다고 한다. 로마군은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했고, 그는 10마리의 황소와 황금 화환을 수여받았으며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이유로 코르부스(Corvu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기원전 348년 23살의 나이에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는 않았고, 기원전 346년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볼스키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사트리쿰을 공략한 뒤 마테르 만투타 사원을 제외한 전 도시를 초토화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43년 세번째로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와 함께 세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 해에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삼니움은 캄파니아로 진출하기 위해 공세를 벌이고 있었다. 캄파니아의 핵심 도시인 카푸아는 로마에 구원을 호소했고, 로마가 삼니움과 싸우기를 꺼리자 아예 로마에 종속되겠다고 밝혔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절단을 삼니움 지도자들에게 보내 카푸아가 자국의 식민도시가 되었으니 더이상 공격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삼니움 지도자들은 오만하게 반응했고, 삼니움 군 사령관은 로마 사절이 보는 앞에서 군대에게 즉시 캄파니아 지역을 약탈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동맹을 맺은 삼니움을 공격한 로마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리비우스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양자는 동맹을 끊고 전쟁을 개시했다. 발레리우스는 2개 군단을 맡아 캄파니아로 진격했고, 코르넬리우스는 삼니움으로 진격했다.
발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가우루스 산에서 삼니움군과 마주쳤다.( 가우루스 산 전투) 발레리우스는 며칠 동안 척후병을 잇따라 보내 소규모 접전을 치르게 함으로써 적의 전투력을 확인한 뒤 전면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후 보병끼리 벌어진 접전에서 승패가 쉽사리 갈리지 않자, 적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병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기병대 역시 삼니움 전열을 뚫는데 실패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은 채 물러났다. 그러자 발레리우스는 말에서 내린 뒤 직접 보병대를 이끌고 공세를 이끌었다. 이 공세는 삼니움인들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발레리우스는 최후의 공세를 시도해보고 역시 통하지 않으면 본진으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런데 로마군이 남아있는 힘을 다해 돌진하자,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삼니움인들은 돌연 도주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하다가, 해가 완전히 져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지자 물러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날 로마군과 대결했던 삼니움인들은 로마인들이 마지막으로 돌격했을 때 눈에서 불을 뿜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날 텅 비어있는 적진을 점거한 로마군은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캄파니아인들을 맞이했다.
그 후 삼니움인들이 캄파니아에서 로마군을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당시 카푸아에서 장기 주둔하기 위해 보급품 마련에 분주하던 발레리우스는 적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숙영지와 보급품을 보호하기 위해 상당 규모의 병력을 남겨놓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수에술라로 행진했다. 이후 적과 가까운 곳에 숙영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상당한 병력을 카푸아에 남겨둔 채 이동했기 때문에, 로마군 진영은 평소보다 훨씬 작았다. 삼니움 병사들은 이를 보고 지휘관들에게 즉시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장군들은 뭔가 함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여겨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대치하던 중 식량이 부족해지자, 삼니움인들은 로마인들이 수적으로 열세하니 섣불리 진영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고 식량 수집병들을 들판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적이 식량 수집에 열중하느라 진영 수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자, 발레리우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삼니움 진영을 급습해 단숨에 점령했다. 그 후 적 진영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고 발빠르고 용맹한 병사들을 엄선한 뒤 삼니움의 식량 수집병들을 습격하게 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삼니움인들은 살해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40,000개의 방패와 170개의 군기가 로마군에 노획되었다고 한다.( 수에술라 전투) 그 후 발레리우스는 동료 집정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와 함께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는 발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가 각각 기원전 343년 9월 21일과 9월 22일에 삼니움족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고 밝혔다.
한편, 카푸아 시민들은 로마에 겨울 동안 삼니움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수비대를 배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발레리우스에게 카푸아 수비를 맡을 병사를 뽑게 했다. 발레리우스는 로마에 돌아가지 않고 카푸아에 남아서 봉급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을 선발해 수비대를 조직했다. 이들 대부분은 집이나 토지가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빚더미에 허덕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카푸아 시민들이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도시의 주인이 되어서 그 부를 가로채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급기야 기원전 342년 캄파니아의 로마군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로 쳐들어오자, 원로원은 발레리우스를 독재관에 선임해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기세좋게 진격하던 반란군은 막상 토벌대가 다가오자 같은 로마인끼리 피를 보는 것을 꺼렸다. 그들이 협상을 요구하자, 발레리우스가 그들 앞으로 나아가서 작년에 자신과 함께 삼니움인들을 두 번 물리친 것을 상기하라고 호소했다. 여기에 억지로 반란군 지도자가 된 티투스 퀸크티우스가 자신이 책임질 테니 동족을 해치지 말고 말로 해결하자고 요구했다. 반란군은 그렇게 하기로 했고, 퀸크티우스는 반란군을 처벌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 것을 호소해 받아들여졌다. 이후 발레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군인 명단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성한 법(Lex Sacrata)'을 제정했고,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켄투리오가 될 수 없다는 법도 통과시켰다. 다만 이같은 기록은 후대 학자들에게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평을 받으며, 이외에도 다른 버전이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기원전 342년 로마군 반란 참조.
기원전 335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칼레누스와 함께 4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전임 집정관들이 시작한 아우소네스족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우소네스족의 도시인 칼라미 시를 포위해 공략에 성공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치렀다. 이후 남은 임기 동안 동료와 함께 시디키네스족과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332년과 320년에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인터렉스(interrex)를 맡았으며, 기원전 309년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아 삼니움족과의 전투를 수행했다. 기원전 301년 에트루리아인들과 마르시인들이 로마를 대대적으로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로원은 70세를 넘긴 그를 독재관에 선임해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그는 마르시 족을 격파한 뒤 밀로니아, 플레스티나, 프레실라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이후 마르시족이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호소하자, 그들과 휴전 협약을 맺고 상당한 공물을 확보했다.
뒤이어 에트루리아와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다가 로마로 잠시 돌아와서 향후 전쟁이 어찌 될 지를 알기 위해 조점술을 행했다. 이때 그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던 기병장관[1]이 에트루리아군과 맞붙었다가 패배해 많은 병사를 잃고 군기 마저 빼앗겼다. 이 패배는 로마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군영으로 돌아온 뒤 군대를 성공적으로 수습한 후 에트루리아인들을 물리쳤고,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00년 다섯 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에 호민관 오굴니우스의 법이 통과되면서 고위 사제직인 폰티펙스와 아우구르(Augur)의 숫자가 늘어났고 플레브스도 이 직책에 선임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가 아이퀴족과 전쟁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299년 에트루리아인들과의 전쟁 도중에 낙마하여 사망한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대신해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간 뒤 회전을 벌이기 위해 에트루리아인들의 농지와 마을을 황폐화시켰지만, 그들이 끝내 응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299년을 끝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30여 년을 더 살다가 기원전 271년에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후대 로마 작가들은 그가 신의 은총을 받아 건강을 유지하면서 많은 공적을 세운 존경받을 만한 로마인이라고 호평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저명한 로마 위인들의 동상들을 포로 로마노에 세울 때 그의 동상 역시 세웠다. 이 동상 머리에는 발레리우스가 결투를 벌일 때 도와줬다고 알려진 까마귀의 형상도 세워졌다.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312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307년에 감찰관을 역임했다. 손자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는 기원전 28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증손자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는 기원전 263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했다.
[1]
리비우스의 기록에서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또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언급되는데, 둘 중 누가 실제로 기병장관을 맡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