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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6:59:16

대 플리니우스

파일:대 플리니우스.jpg
이름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Gaius Plinius Secundus)
출생 23년 또는 24년
사망 79년
지위 로마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
2.1.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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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세기에 활동한 로마 제국 정치인, 작가, 박물학자, 해군 제독.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친구였으며, < 박물지(Naturalis historia)>의 저자로 유명하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위험에 빠진 폼페이 등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다 순직했다.

그 업적을 기려 화산 분화의 양식 중 가장 격렬하고 폭발적인 분화에 플리니식(Plinian) 분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 생애

서기 23년 또는 24년에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노붐 코뭄(Novum Comum: 현재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코모)에서 출생했다. 16세기 베로나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기사계급 출신인 플리니우스 켈레르였고 어머니는 마르첼라였다. 여동생으로 플리니아가 있었는데 카실리 가문으로 시집가서 소 플리니우스를 낳았다. 즉, 대 플리니우스는 소 플리니우스의 외삼촌이다. 소 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기를 두려워하는 일 중독자였다고 한다. 걷는 것을 시간낭비로 여겨 가마를 타고 로마를 돌아다녔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또한 일생을 글쓰기에 전념하여 팔을 따뜻하게 유지하고자 긴 소매가 달린 튜닉을 입었고, 저자 100명 이상이 쓴 저서 2천여 권을 읽었으며 기록을 2만 개 이상 목록화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로마로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서기 46년 군대에 입대해 하급 장교가 되었고, 47년 게르마니아로 가서 라인강 전선에서 복무하다 나중에 기병대장이 되었다. 그는 전선에 복무하는 동안 남는 시간을 활용해 말에서 창을 던지는 어려운 기술에 대한 소책자를 집필했고, 훗날 복무 경험을 토대로 20권에 달하는 저서 <게르마니아 전쟁(Bella Germaniae)>을 저술했다. 역사가 타키투스 또한 저서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를 집필할 때 이 책을 많이 참고했으나 정작 게르마니아 전쟁은 실전되었다. 한편, 그는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될 베스파시아누스와 친구가 되었다. 소 플리니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종종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라인 전선에서의 복무를 마친 뒤, 그는 로마로 돌아가서 공직에 근무했지만 그리 주목받을 만한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네로 황제가 집권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숨죽여 지냈다. 그 대신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에 대해 견해를 밝힌 글을 집필했다. 그는 칼리굴라가 다소 기이한 행동을 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미치광이는 절대 아니었다고 보았다. 또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존경할 만한 성품을 갖췄고 당대의 가장 학구적인 작가들 중 하나였다고 했지만,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난행을 통제하지 못한 게 흠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라틴어 문법에 관한 8권짜리 책을 집필했고, 웅변을 잘하는 비법에 관한 소책자도 출간했다. 라인 전선에 복무하던 시절에 상관으로 모셨던 폼포니우스 세쿤두스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여성 화장품에 대한 조언이 담긴 글도 집필했는데, 당나귀의 우유는 주름을 없애고 흰 납과 혼합된 버터는 여드름에 유용하며, 따뜻한 소의 태반은 안면 궤양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서기 68년 네로 황제가 몰락하고 69년 친구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새 황제로 등극한 뒤, 그는 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스페인, 갈리아, 벨가이, 그리고 히스파니아 일대의 황실 감찰관으로 삼았고, 그는 이 지역들의 재정을 책임졌다. 그는 이 시기에 식물학, 지리학, 생물학에서 수학, 농업, 예술,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 <박물지>를 집필했다. 서기 75년에서 76년 사이에 로마에 귀향한 뒤 제국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해안 경비를 책임졌다.

2.1. 사망

서기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 베수비오 화산 인근의 해안 도시들이 위험에 처했다. 당시 미세눔에 주둔하던 그는 스타비아에 있던 친구 레티나로부터 급보를 접하자마자 여러 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나폴리만을 가로질러 헤라쿨라네움 근처의 해안으로 향하여 피난민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이때 화산재가 배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어서 떠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행운은 대담한 자를 선호한다."[1]라며 거부하고, 원로원 의원 폼포니아누스가 있는 스타비아로 향하여 그를 구조했다. 그러나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나폴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기서 묶여 있어야 했다.

그들은 바람이 잦아지길 기다렸지만, 화산의 상태가 갈수록 위험해지자 저녁 늦게 급히 출항하기로 했다. 그러나 도중에 유독가스가 배를 덮쳤고, 그는 질식사했다. 당시 나폴리 만에서 상황을 지켜봤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사흘 뒤 발견된 삼촌의 시신엔 어떠한 외상이 없었고, 깊이 주무시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플리니우스는 화산 활동에 흥미를 느끼고 해안으로 접근했다가 화산의 열기를 피하려고 노예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간주하고 있다.


[1] 이는 후에 NATO군 연합신속대응군단의 슬로건으로 쓰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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