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 라틴어: Publius Saempronius Soph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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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조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아버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04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
후임 |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키우스 게누키우스 아벤티넨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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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플레브스 가문인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푸블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310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는 18개월간 재임하면 물러나는 것이 관례인 감찰관을 꿋꿋이 맡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를 비난했다. 카이쿠스가 자신은 그 관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자, 셈프로니우스는 권력을 탐하는 감찰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다른 호민관 3명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부산되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304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한다.기원전 304년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삼니움인들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에 평화 협정을 맺자고 요청했다. 로마인들은 삼니움과 오랜 전쟁을 벌이느라 지칠대로 지쳤기 때문에 삼니움인들의 요청에 반색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던 그들이 진짜로 평화를 원하는지 의심스러워 그를 군대와 함께 삼니움으로 파견했다. 소푸스는 삼니움 전역을 여행하면서 들리는 곳마다 선물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원로원은 소푸스의 보고를 받고 삼니움인들이 비로소 평화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확신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다만 협약 내용에 대해서는 리비우스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소푸스와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가 아이퀴족과 전쟁을 일으켜 50일 만에 31개 도시를 점령하고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오직 소푸스만이 아이퀴족과 맞붙어 승리하고 50일 동안 40개 도시를 점령했다고 한다.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이 통과되어 평민이 고위 사제단에 선출될 수 있게 된 후, 그는 최초의 평민 출신 폰티펙스(Pontifex, 신관) 중 한 명이 되었다. 기원전 300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가 감찰관을 맡는 동안 2개 부족이 창설되면서 로마에 속한 부족 집단이 33개로 늘어났다.
기원전 296년 법무관을 맡은 그는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켈트족이 로마를 합동 공격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고 다른 집정관들이 다른 곳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바쁘자, 원로원에 지시에 따라 "모든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모집해 로마를 경비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는 기원전 268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252년 감찰관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