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겔리우스 라틴어: Lucius Gell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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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20년 또는 기원전 113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겔리우스(아버지) 팔라(첫번째 아내)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2년 |
전임 |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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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한 플레브스 집안 출신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는 그의 아버지가 그와 같은 프라이노멘인 '루키우스'를 사용했다고 언급햇지만, 그 외에 그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집정관이던 시기에 출생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기원전 120년 집정관 카르보와 기원전 113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중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추정한다.기원전 94년 로마와 피레우스 시 사이의 동맹 협약이 체결될 때 '루키우스 겔리우스'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94년에 법무관으로서 이 협상을 주도했고, 이후엔 동방 속주를 맡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키케로는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가 자신에게 들려준 일화를 소개한다. 겔리우스는 법무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아테네에 들리고는 그곳에 살던 모든 철학자를 소집한 뒤 서로간의 차이점을 해소하고 화해하라고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생을 다투며 보낼 생각이 없다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합의에 이르든지 내가 도와주겠다."
이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던 그는 기원전 74년 가이우스 베레스가 시칠리아 속주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착취를 벌인 일로 고발당했을 때 원고측 증인으로 나서 베레스의 악행을 증언했다. 당시 시칠리아인들의 변호를 맡아 베레스가 유죄 판결을 받도록 이끌었던 키케로는 이때부터 겔리우스와 친분을 맺었다. 기원전 72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약속받은 속주민들에게 그대로 시민권을 주자고 제안해 통과시켰다. 또한 특정 형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속주민들을 비난하는 팜플렛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이 무렵, 이탈리아는 제3차 노예 전쟁에 휘말렸다. 원로원은 스파르타쿠스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두 집정관에게 각각 2개 군단을 줘서 노예군을 토벌하게 했다. 그는 캄파니아와 아풀리아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추적했고, 렌툴루스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티부르티나 가도를 따라 남하했다. 그는 얼마 안가 크릭수스가 이끄는 노예군과 가르긴 산에서 맞붙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크릭수스에게는 3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2만 가량의 병력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양측은 곧바로 치열한 결전을 벌였으나 전투력이 우월한 로마군이 곧 승기를 잡았고, 반란군 3분의 2가 사살당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크릭수스 본인은 대대장 퀸투스 아리우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겔리우스는 크릭수스를 무찌른 뒤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향하던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그들이 추격하는 걸 정찰병을 통해 확인하자 곧장 방향을 틀어 겔리우스와 맞붙어 크게 이겼고, 겔리우스의 군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이때 사로잡힌 300명의 로마 군단병들이 검투 경기를 벌여 서로 죽게 함으로써 크릭수스의 죽음을 기렸다고 한다. 그 후 스파르타쿠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북상했다가 기원전 72년 가을에 다시 남하했다. 그는 렌툴루스와 연합하여 피케눔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맞붙었으나 또다시 패배했다. 로마 시민들은 두 집정관이 스파르타쿠스에게 완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황 상태에 빠졌고, 원로원은 두 집정관이 임기가 끝날 때까지 스파르타쿠스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수석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임페리움을 넘기기로 했다.
이렇듯 스파르타쿠스에게 완패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임페리움을 넘기는 굴욕을 맛보았지만, 기원전 70년 동료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라우디아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전체 원로원 의원의 8분의 1에 달하는 64명을 원로원에서 제외시켰다. 이는 역대 감찰관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 테오도르 몸젠은 이에 대해 두 사람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구축한 체제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시킬 새 체제를 구성하길 희망했던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크라수스의 의중에 따랐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한 두 감찰관은 동맹시 전쟁 중에 공식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은 이탈리아인들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시민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91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확인되었다.
기원전 67년, 그는 동료 집정관이자 감찰관 렌툴루스와 함께 폼페이우스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에 발탁되어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는 일에 종사했다. 기원전 63년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가담한 이들을 재판없이 처형하자는 키케로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음모자들로부터 로마를 구한 키케로에게 시민관을 수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59년 집정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농지법 개혁안에 반대하면서 "내가 살아있는 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이에 대해 키케로는 "조금만 기다려라. 그리 오래 지연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거라고 농담했다. 당시 겔리우스는 의원들 중에서 최고령이었기에 오래 못 살 거라는 것이었다. 겔리우스는 기원전 55년 원로원 회의에 여전히 참석했지만, 기원전 52년 이전에 사망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인 팔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를 두었다. 이후 팔라와 이혼한 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재혼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아들 겔리우스가 자신의 아내이자 그의 계모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고 많은 원로원 의원을 초청한 뒤 집안에서 가정 법원을 세우고 아들을 기소했다. 아들 겔리우스는 뚜렷한 증거가 없었기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세간에서는 그가 실제로 계모와 간통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아들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는 해방자 내전 시기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편에 섰다가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게 발각당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귀순했다.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함대의 우익을 지휘했지만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후 기록상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