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Lucius Cornelius Cin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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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4년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일리리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아버지) 안니아(아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아들) 코르넬리아 킨나(딸) 율리우스 카이사르(사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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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지지자들을 대거 숙청한 뒤 기원전 86년 마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자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어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분배하고 술라에 맞설 준비를 갖췄다. 그러나 기원전 84년 초 일리리아에 군대를 수송하던 중 병사들의 반란으로 피살당했다.2. 생애
로마 공화국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지만,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 없으며 단지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기원전 127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2]의 부관으로서 마르시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기원전 88년 동맹시 전쟁이 마무리된 후, 원로원은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나눠주되 10개의 새로운 부족을 세우고 거기에 국한시키려 했다. 이에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이탈리아인들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모든 부족에 그들을 분배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기존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로마 시민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술피키우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야합해 마리우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이끌고, 그 대가로 자신의 법안을 통과시키는 걸 돕게 했다.이 야합이 성공하면서 술피키우스의 법안이 통과되고 마리우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 토벌을 맡은 원정군 지휘관을 맡으면서 모든 게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기존에 원정군 사령관을 맡았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지휘권을 빼앗으려는 마리우스에 분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마리우스는 검투사와 노예들을 급히 끌어모아 맞섰으나 참패하고 아프리카로 도주했고, 술피키우스는 피살되었다. 술라는 술피키우스의 법안을 폐지하고 민회와 호민관의 권한을 제한했다. 킨나가 이 혼란 때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술라가 로마에 무단으로 쳐들어온 것에 깊은 반감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87년 집정관 선거에서, 술라를 따른 후보들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낙선했다. 술라는 선거 결과에 태연한 체하면서, 이것이 자신을 폭군이라 칭한 정적들의 말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궁극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집정관들이 자기가 동방으로 떠난 사이에 배신하는 걸 방지하고자 신임 집정관들의 취임 선서를 집행할 책임자로서 그들이 자신의 정치 개혁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두 집정관은 많은 군중 앞에서 그렇게 서약했고, 약속을 어길 시 추방형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바닥에 돌을 던졌다. 술라는 이 정도면 안심할 만하다고 여기고 카푸아에 주둔한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떠났다.
그러나 기원전 87년 1월 취임한 킨나는 술라를 탄핵하려 시도했다. 그는 호민관 비르기니우스를 보내 로마 시민들을 불법 살해한 죄로 술라를 기소했다. 하지만 호민관의 직권 범위는 로마 시내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술라는 기소를 무시하고 동방으로 떠날 군단들을 집결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1개 군단은 뒤에 남겨 놀라 포위를 유지하게 하고, 나머지 5개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로 떠났다. 술라가 사라지자, 킨나는 이탈리아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술피키우스의 법안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에 옥타비우스는 기존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대파를 이끌었다. 투표 당일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킨나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우스는 지지자들을 포럼으로 이끌어 킨나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킨나는 로마 시에서 탈출했고, 옥타비우스는 민회를 움직여 킨나를 집정관 직에서 박탈하고 추방형을 내린 뒤 신관단의 일원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로 대체했다.
킨나는 로마를 떠난 뒤 티부르, 프라이네스테, 놀라 등 남부 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해 순식간에 10개 군단 이상을 모집했다. 여기에 술라에 반감을 품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등 귀족들을 대거 끌어모아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여기에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사병을 이끌고 가담했다. 옥타비우스는 스트라보의 지원을 받고 항전했지만, 기원전 87년 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스트라보가 사망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마리우스 등은 로마에 대한 식량 공급을 차단했고, 결국 원로원은 킨나, 마리우스와 협상하여 그들의 신원을 복구시키기로 했다.
마리우스군은 로마 시로 돌아온 뒤 닷새 동안 대숙청을 자행했다. 옥타비우스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참수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포룸에 전시되었다. 킨나를 대신하여 집정관에 선출되었던 메룰라는 재판에 회부되자 자살을 택했다. 그 외에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 등 전직 집정관 6명을 포함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처형되었다. 술라는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고, 그의 집은 불태워졌으며, 재산 역시 몰수되었다. 그가 세운 법은 폐지되었고, 킨나와 마리우스는 기원전 86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마리우스는 7번째 집정관을 맡아 술라를 토벌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이끌 준비를 하다가 1월 중순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킨나는 마리우스 사후 한동안 유일한 집정관을 맡다가 여름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기원전 85년과 기원전 84년에 그나이우스 파필리우스 카르보와 함께 집정관에 잇따라 당선되면서, 로마와 대부분의 속주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마리우스의 지지자들과 밀월 관계를 맺었으며, 힘들게 얻은 로마 시민권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하는 삼니움인과 루카니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는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채무자들이 부채의 4분의 1만 갚으면 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급격한 개혁은 혼란을 가져온다는걸 잘 알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인에 대한 시민권 분배를 단번에 진행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추진했다. 이탈리아인들은 그가 죽은 후인 기원전 84년 또는 83년이 되어서야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와 더불어 살아남은 귀족들과 화해하고 권력을 어느정도 분배했고, 그 덕분에 로마는 몇년간 평온을 유지했다.
한편, 킨나는 동방으로 떠난 술라를 물리치기 위해 기원전 86년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게 2개 군단을 맡기고 동쪽으로 보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유혹했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결국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길 포기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고자 이동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부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에게 피살되었고, 핌브리아 역시 미트리다테스 6세와 평화협약을 맺은 술라와 맞서려다 부하들이 대거 술라에게 귀순하자 자살했다.
그 후 술라는 소아시아 일대의 여러 신전과 도시들로부터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그러면서 로마에 자신이 곧 돌아가서 권력을 불법으로 빼앗은 자들로부터 로마를 구하겠다고 통보했다. 킨나는 이에 맞서기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군대를 모집하고, 함대를 수리하고, 식량과 돈을 모았으며, 이탈리아인들에게 술라가 이긴다면 로마 시민권을 도로 빼앗길 테니 최선을 다해 맞서라고 선전했다. 기원전 84년 초, 킨나는 군대를 아드리아 해 너머 일리리아로 파견했다. 그러나 풍랑이 거센 겨울에 바다를 건너는 건 무리한 짓이었고, 한 분견대가 거센 물살로 인해 병사 절반이 수장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까스로 생존한 병사들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안코나 시에 있던 파견대도 도항을 거부했다. 이에 킨나는 강경하게 처벌하고, 일리리아로 가서 눈이 덮인 산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것을 강요했다. 병사들이 그런 그에게 집단 항의하자, 킨나는 직접 병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가 집합한 병사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한 병사가 길을 터주기를 거부하다가 킨나의 경호원 한 명에게 가격당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킨나와 그의 일행을 모두 살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병사들은 킨나가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킨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내밀며 백인대장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이렇게 말하며 킨나를 죽여버렸다고 한다.
"나는 약속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경하고 무법한 폭군을 처벌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킨나는 안니아와 결혼하여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딸 코르넬리아 킨나를 낳았다. 아들 루키우스는 기원전 44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때 암살자들을 옹호하고 카이사르를 비난했다가 민중의 분노를 사서 살해당할 뻔했다. 코르넬리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안니아는 남편이 사망한 후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