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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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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래3. 소멸4. 검투사의 특징5. 검투사의 실력6. 병종 구분
6.1. 동물과 싸우는 사람6.2. 사람과 싸우는 검투사6.3. 여성 검투사
7. 기타 이야깃거리8. 대중 문화 속의 검투사
8.1. 영화8.2. 드라마8.3. 만화8.4. 소설8.5. 게임
9. 관련 문서

1. 개요

/ Gladiator
Ave Imperator, Morituri te salutant.
"황제 폐하 만세, 곧 죽을 자들이 인사 올립니다."[1]
고대 로마에서 유행했던 검투 대결에 출전하는 선수. 굳이 비유하자면 현대의 프로레슬러 격투기 선수로 비유할 수 있다. 검투사를 가리키는 라틴어 글라디아토르의 뜻은 을 뜻하는 글라디우스를 다루는 사람이다. 다만 모든 검투사가 검을 무기로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고 , 도끼, 둔기 등 여러 무기를 사용했다.

경기장에서 칼이나 그물, 삼지창 등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종의 격투가로 야생 동물,[2] 다른 검투사, 범죄자 등과 싸웠다. 흔히 원형 경기장에서 싸우는 모습이 유명하다.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로 유명하지만, 모든 경기가 패자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신변의 자유가 적었다는 점에서 '검투사'보단 '검노'라는 번역이 더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래 서술을 보면 알 수 있듯 노예가 아닌 검투사들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특히나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고 살생을 피하는 하나의 스포츠로 발전한 로마 제국 후반기에는 유명 검투사들은 최상급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또한 검투 게임은 스폰서[3] 프로모션이 존재했고, 심판까지 존재해 단순 노예들의 막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근데 검투사 게임이 재밌는 게요, 로마 사람들은 엄격하게 계약하고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듯이 아무렇게나 막 죽이는 게 아니고 요즘말로 하면 기획사 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규모가 얼마냐, 며칠 할 거냐, 몇 명 동원할 거냐, 생사 불문의 경기는 몇 번 할 거냐, 어느 정도 수준의 선수로 맞붙일 거냐 같은 것을 기획사에서 다 계산해서 한 거예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33부 中
다만 아무리 콤모두스 같은 사례가 있다고 한들 검투사는 로마 시민권을 온전히 누릴 수 없기에 인기 있을 수는 있어도 명예롭다고 보기엔 어려운 직업이었다.[4]

2. 유래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BC 1세기에 고대 그리스 역사가 니콜라오스는 본래 에트루리아의 제사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썼다.[5] 한 세대쯤 후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BC 310년에 캄파니아가 삼니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기록에서 에트루리아설과 캄파니아설이 계속 번갈아 나오는데, 현재는 로마식 검투 경기 자체는 캄파니아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검투사가 되는 자격 조건은 따로 없었다. 초창기에는 포로 노예를 검투사로 훈련시켜 죽고 죽이게 했지만,[6] 나중에는 일반 시민들도 검투사로 자원하여 프로모터와 계약을 맺고 직업으로 삼거나 심지어 귀족 자제들도 검투사를 업으로 삼는 등 흐름이 많이 바뀐다. 물론 자유민 검투사는 엄연히 계약 선수이므로 모든 조건을 알려주고 상호 합의한 뒤에야 경기에 나갔다. 극단적으로는 콤모두스 황제가 경기장에서 직접 싸운 사례도 있는데, 황제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살상을 금하고 한쪽이 항복하면 끝내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7] 실력 좋은 검투사는 요즘의 연예인 내지 스포츠 스타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화산이 터져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지만, 폼페이에는 셀라두스라는 트라키아인에 대해 여자들이 사모하는 남자라고 쓴 낙서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여성 팬을 거느렸다는 소리.

스파르타쿠스 반란 등이 일어나기도 한 것을 보면 노예 출신인 제정 이전의 검투사들의 삶은 자유민 출신의 후대의 검투사에 비한다면 비참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은 진압하러 온 로마군을 격파하고, 생포한 로마군 포로들에게 자신들이 당했던 검투 경기를 시켜서 복수했다고 한다. 이건 복수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이기도 했는데, 원로원은 이 부분에서도 분노했다. 이런 추모 경기 등은 높으신 분들만 주최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Uri, vinciri, verberari, ferroque necari
몽둥이로 맞고, 쇠사슬로 묶고, 불로 지지고, 칼로 죽여도 좋다.[8]

제정 후대의 검투사들의 생활과 취급도 제정 전에 비하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가 연예인 취급을 받은 것은 맞지만, 현대와는 달리 로마는 배우를 비롯한 연예인이 최하층 천민 취급을 받았던 사회였고 검투사의 신분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현대에서도 성공한 스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예인은 밤무대 가수 정도 수준의 사회 최하층이다. 한국의 직업별 평균소득 리스트를 보면 당당하게 최하위를 차지하는 게 연예인이다. 이들은 지원할 때 위 인용구와 같은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는 스스로를 타인의 종으로 낮추고 로마 시민권이 있다고 해도 시민권이 제공하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선언과도 같았다.[9] 자유민 검투사가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일반적인 상한선은 스스로 싸울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였고, 경기장에 나가기를 거부할 권리는 있지만 일단 나가면 상대에게 죽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권리의 상한선을 획득한 최고참 검투사(auctorati)조차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에게 공연을 하여 돈을 버는 연예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일지언정 그 이상의 법적인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10]

제사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나 추모 경기, 처형식 행사 등으로 자주 치러졌다는 점을 들어 검투 경기를 인신공양 풍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3. 소멸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검투 경기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검투 경기는 지나치게 잔인하고 부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점점 줄어들었다.[11] 하지만 열성 관중의 맥은 쉽게 끊이지 않았던 데다 검투사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검투 관두고 나가도 정작 검투 기술 말고 배운 게 없다 보니 밖에 나가서 할 게 없어 도적이 되느니 차라리 검투사로 밥 벌어 먹는 게 낫다고 다시 돌아오는 일도 많았다. 은퇴를 수차례나 번복하고 검투사 생활을 하다가 끝내 마지막 경기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한 검투사 이야기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4세기 이후 상대의 몸에 상처만 내면 무조건 승리하도록 규정이 바뀌고 정당한 이유 없이 저항을 포기한 상대를 죽이는 것도 금지되면서 오히려 이 시기 검투사의 직업적 위험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로마 황제들도 금지령을 반포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수위만 완화되면 묵인하는 일이 많았고[12] 오히려 대중의 구매력이 떨어지고 검투사를 유지할 만한 거액의 스폰서가 줄면서 검투사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13]

4. 검투사의 특징

세간의 사람들이 흔히 검투사 하면 떠올리는 대로, 검투사는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스매치를 벌이는 잔혹한 직업이었다. 다만 모든 경기에서 패자를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로 양성할 전쟁포로들이 넘쳐났던 공화정 초기의 검투 경기에서는 무자비하게 패자를 죽이는 경향이 높았다. 어차피 검투사 양성소에 공급되는 노예는 차고 넘쳐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으로 "패자를 무조건 죽이는 검투 경기를 금한다."라고 명했지만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 했다. 공화정 초기에 높았던 검투사의 사망률은 검투 경기가 절정에 달한 제정 중기까지 서서히 감소해갔다. 점점 관중들과 황제가 사망자 없는 시시한 경기에 질렸기 때문이다.

검투사들의 사망률이 높았다는 것은 통계가 증명한다. 대략 한 번의 검투 경기를 치를 때마다 최소 20명의 검투사가 죽어나갔다. 투입되는 검투사의 숫자가 평균적으로 많아봐야 백 명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원 사망(50명)까진 미치지 못 해도 상당히 높은 숫자다. 총 투입되는 검투사 숫자가 100명이라 가정할 경우 20명이 사망한다면 전체 투입원 중 1/5가 경기 끝났을 적엔 이미 사망했다는 거다. 100명 투입했을 때 기준으로 50명이 전원 사망이라 할 경우 그 반절이 25명인데, 20명은 거기서 겨우 5명 정도 덜한 숫자다. 즉 전원 사망을 가정할 경우 실질적으로는 반절 가까이 되는 검투사가 경기 때마다 죽어나갔다는 뜻. 많이 잡아서 평균 투입원의 2배인 200명 참여했다고 가정할 경우 20명이 죽어나갔다면 전체 대비 10명 중 한 명이 죽은 거고 전원 사망을 100으로 잡을 시 실제 경기 끝나고 나서 최소 20명이 죽었다면 실질적으론 거기의 1/5씩 죽어나간 거니 꽤 많이 죽어나간 게 맞다. 게다가 저건 최소다. 그 이상 죽어나간 경우도 있다는 뜻. 게다가 신참 검투사는 보통 1년 내로 사망하기 마련이고, 운이 좋아 1년을 넘기더라도 3년 안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앞서 언급한 검투사 20명의 비문을 해석해보면 8명이 아예 처음 싸워본 신참 검투사였고, 베테랑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검투 경기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베테랑 검투사가 신참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죽이는 것을 싫어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승부를 좋아했다. 그래서 검투사는 무조건 비슷한 실력대의 검투사와 싸우는 것이 원칙이었는데[14], 신참이라 해도 검투사로서의 재능이 뛰어나 동기들 중엔 당해낼 사람이 없는 경우엔 베테랑 검투사와 붙이고, 심지어 신참이 베테랑 검투사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신참은 신참끼리, 베테랑은 베테랑끼리 붙는 경우가 많았다.

베테랑 검투사는 몸값이 높은 데다가 이들을 키우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베테랑끼리의 전투는 일단 승패가 결정되더라도 쉽사리 죽이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테랑 검투사들은 경험으로 서로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거기다 같은 양성소의 동료끼리 싸울 경우, 한솥밥을 먹은 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죽이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경험이 얼마 없는 신참에게 그런 노련함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보통 신참 검투사들의 경기는 한쪽의 사망으로 끝나곤 했다. 물론 베테랑들에게도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승리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기에 경기 도중 상대가 사망하는 일이 제법 발생하곤 했다.

검투 경기의 패자를 처분하는 것은 보통 관중이 결정했다. 관중이 보기에 경기 내용이 재미가 없었다면 패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반대로 지더라도 경기가 스릴 있고 재미가 있었다면 관중들은 검투사를 살리려고 했다. 이런 경우 검투사는 졌지만 살아서 콜로세움을 나갈 수 있었다. 양성 비용이 많이 드는 검투사를 살리고 아래 티투스 황제의 예에서처럼 흥행에 도움이 되는 일화로 포장할 수 있어서 모든 관계자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관중이 패자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죽이냐 마느냐의 결정권은 황제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경우 관중들이 살리고 싶어하는 검투사를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또 관중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는 경우 보통 주최자나 심판이 패자의 목숨을 결정했다.

검투사들에게 있어 어떤 황제를 만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베테랑 검투사라 해도 황제의 마음에 안 들면 목이 날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대우도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칼리굴라 황제의 경우, 육성 및 관리 비용이 많이 들어 국고 낭비가 심하고 부담간다는 이유로 검투 경기에서 승리한 검투사들을 다른 양성소에 팔아버렸다. 이게 왜 문제냐면, 승리한 검투사들은 시설이 좋고 비교적 대우를 받는 황제 직속 양성소에서 열악한 사설 양성소로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경우, 특이하게도 죽는 순간의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패배한 레티아리우스 검투사의 목을 치도록 명령했다.[15] 콤모두스 황제는 같은 양성소의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기를 머뭇거리며 소극적으로 싸우자 격노해 모든 검투사를 한꺼번에 투입시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관중의 의견에 반하는 명령은 대중에게 좋지 않게 보였기 때문에 평판에 악영향을 끼치고는 했다.

모든 황제가 다 검투사들에게 잔인무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례적인 케이스도 있었는데, 티투스 황제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즉 콜로세움의 완공을 축하하는 검투사 경기에서 유명 검투사 프리스쿠스(Priscus) 베루스(Verus)가 치열하게 싸운 끝에[16] 서로 동시에 항복하자, 두 검투사 모두에게 종려나무 관과 루디스(목검)를 하사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었다. 쌍방 모두의 승리라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로마 제국이 서서히 몰락해가던 4세기 즈음에는 검투사로 공급할 노예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자유민 검투사였기 때문에 사망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상대방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승패의 조건을 완화하는 식으로 운용되었다.

5. 검투사의 실력

검투사는 온 로마에서 최고로 검술 실력과 싸움 기술이 뛰어난 존재들이었다. 검술 훈련 말고도 진지 구축이나 숙영에 관련된 잡다한 기술을 배워야 하는 군단병과 달리 검투사들은 온전히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검술 실력은 당연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현대로 치자면 맨손 격투기 부분에 있어 현역 군인/경찰과 격투기 선수의 차이와도 흡사하다.

검투사들은 목검으로 나무를 타격하는 기초적인 기술 훈련에서부터 다양한 체력 훈련을 하였는데, 무작정 빠짐없이 지옥같이 힘들게 훈련을 시키는 방식은 아니라서 4일을 기준으로 돌아가면서, 매일 훈련량이나 방식을 다르게 했다. 예컨대 첫날은 고강도 훈련을 하되 웜업 목적으로 시간을 짧게, 둘째 날은 고강도 장시간 체력훈련으로, 셋째 날은 휴식, 넷째 날은 중강도 훈련으로 4일에 한 번씩 휴식을 가지면서 훈련 강도와 시간도 다르게 조절하면서 선수들의 체력 배분에 신경을 써서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링크

더불어 목적에 따라서 근력, 스피드, 체력향상용 복합 컨디셔닝 트레이닝 등으로 체계적으로 나뉘었다.

근력 훈련으로는 땅파기와 무거운 물건 들기 및 들고 걷기[17] 및 서있기, 로프 오르기, 줄 및 대들보 타기, 중량을 들고 팔을 올린 상태로 다른 사람이 밀어대는 것을 버티기 등이 있었다.

스피드 훈련으로 뛰기와 펀치백 치기, 공을 들고 뛰기, 섀도 복싱, 팔과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는 것 등 달리기 연습에도 발끝으로 선 상태로 팔의 전후 왕복 속도만 빠르게 하거나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빠르게 왕복하는 제자리 뛰기 훈련도 있었다.

그중 백미는 이를 혼합한 복합 컨디셔닝 겸 체력 훈련으로 고반복 제자리 점프, 무게를 지고 점프하기, 갑옷 입고 전력질주하기 등이 있었다.

훈련을 위해 여러 가지 운동 기구도 사용하였는데, 할테레스(Halteres)라는 그리스식 덤벨도 있었고, 자연석이나, 혹은 암석에 손잡이용 구멍을 뚫어서 훈련에 사용하기도 했는데 현존하는 것 중에 100kg가 넘는 훈련용 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외에는 모래 주머니도 있었고, 현대 기계체조의 안마(pommel horse)와 동일한 것, 다양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위해 공을 이용한 훈련 방법도 있었다.

검투사들의 실력과 충성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황제들은 은퇴한 검투사를 근위대에 채용하거나 내전이 벌어지면 검투사 부대를 조직해서 투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예로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게르만족이 마리우스 시대 이후 본국 이탈리아를 침공해 북이탈리아 최대 도시 아퀼레이아를 포위하자, 검투사들을 소집해 기존 병력과 해방을 조건으로 만든 노예 군대와 합류시켰다. 그리고 이때 소집에 응한 검투사들은 아퀼레이아 포위전에 합류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다.

검투사들의 전투는 무조건 실전이었다. 서로 봐주거나 짜고 치는 경기는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검투 경기는 조 추첨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관중들이나 검투사들이나 자신이 정확히 누구와 싸우게 될지는 경기 날짜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가령 자신이 레티아리일 경우 주로 세쿠토르나 무르밀로와 싸우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투사들은 평소 양성소에서 훈련하면서도 훗날 자신과 싸우게 될 검투사 그룹의 기술이나 실력을 눈여겨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러 검투사 양성소가 참여할 정도로 큰 경기의 경우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끼리 싸우기 때문에 검투사들을 곤란하게 했다. 같은 병종이라 해도 상대방의 스타일에 따라 싸우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방과 싸울 경우 실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상대방이 어떤 유형의 전술을 구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큰 경기에 투입되는 검투사들은 서서히 탐색전을 하며 경기의 흐름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실제 로마의 정규군과 검투사가 겨루기도 했는 데 로마 정규군이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한다. 로마 정규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체로 대오를 갖춰 싸우는 집단 전술이지 1:1 대결이 아니었고, 진지 축성, 식사 조리처럼 여러가지 잡무도 병행하느라 온전히 단련만 할 수 없었기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반대로 백인대장을 필두로 한 백인대와 검투사 100명이 동시에 싸우게 했다면 전원이 통일된 상위호환 무장과 전술[18]을 갖춘 정규군 쪽이 유리했을 것이다. 로마군에 대한 평가 중 "체구가 건장한 게르만족 전사들 앞에 서면 라틴족 병사들은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대규모 전투를 벌이면 로마군이 이겼다"라는 것과 비슷한 사례인 셈.

6. 병종 구분

6.1. 동물과 싸우는 사람

동물과 싸우는 사람은 베스티아리(Bestiarii)[19][20]라고 불렀다. 사실 엄밀히 말해 글래디에이터는 사람과 싸우는 직종만을 가리키므로 베스티아리는 글래디에이터로 취급되지 않는다.

원형 경기장에서 이들은 오전에 싸웠으며, 이 오전 시간에는 동물끼리의 싸움도 벌어졌다.

이들은 대개 제국 각지에서 잡아오거나 수입해온 호랑이, 사자, 불곰 등 희귀하고 위험한 맹수들과 싸웠기 때문에 이들은 활과 창, 횃불, 갑주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스코틀랜드 사냥개들을 대동한 채 맹수들과 대결했다. 대개 베스티아리가 유리하지만 동물이 이길 확률도 약간 있었다. 이 때문인지 관중들은 짐승을 죽이는 장면 못지않게 베스티아리가 죽는 장면을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

맹수를 따돌리기 위한 통로나 엄폐물 등의 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보다 정면으로 맹수에게 대항할수록 더 많은 환호를 받았으며 때로는 오늘날의 투우처럼 짐승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리거나, 사자나 호랑이와 대적하면서 죽마 위에 서서 싸우는 등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는 선수도 있었다. 심지어 이나 사자를 맨손으로 대적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도적 수괴나 기타 중죄인을 이런 식으로 죽이는 일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자가 박해받던 크리스트교 순교자들.

상금과 명예를 위해 싸우는 베스티아리는 용기의 증명이라고 하여 젊고 용맹한 사내에게 권장하기도 했으며, 네로나 콤모두스는 직접 베스티아리로 나서서 맹수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런 상금 경기를 하는 베스티아리를 위한 훈련 교실도 존재했다.
그의 사격술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고 ...(중략)... 한번은 그가 끝이 초승달 모양인 화살로 미우레타니아의 타조들을 쏘았는데, ...(중략)... 콤모두스가 화살로 타조들의 목 맨 윗부분을 맞추어 쓰러뜨렸더니, 새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녔다.
헤로디아누스, 1. 15

6.2. 사람과 싸우는 검투사

여러 종류의 검투사들
명칭은 왼쪽에서 오른쪽 순
파일:Gladiator.jpg
세쿠토르
Secutor
프로보카토르
Provocator
호플로마코
Hoplomaco
트라키오
Tracio
에퀴테
Equite
무르밀로
Murmillo
시소르
Scissor
레키아리오
Reciario
위의 베스티아리가 오전에 싸우면, 오전 경기로 생긴 시체를 치우고 모래를 새로 뿌린 뒤 사람끼리 싸우는 경기가 벌어졌다. 이들은 무장과 전투 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무장과 전투법으로 다른 부류의 검투사들과 싸웠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종격투기와 비슷하다. 원래 검투사 경기는 죽은 로마 병사들의 원혼을 기린다는 희생제의 개념에서 전쟁 포로들을 잡아와서 시작한 것이고, 또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터의 모습을 재현해 보인다는 목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검투사 타입들은 승패의 흥미로움을 더해주기 위해 다양하게 늘어가는데, 병종 간에 일방적인 승패가 가려지지 않도록 밸런스 패치가 가해졌다. 더 유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를 줄이는 식으로 페널티를 주고, 불리한 병종에게는 방어구나 무장을 더 늘리고 숫자를 늘리는 식. 보통 얼굴과 팔다리는 철저히 보호했는데, 치명상으로 인해 경기가 일방적으로 흘러가 지루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흉부-복부의 방어는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결정타를 먹일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불리한 병종이라면 흉부-복부의 방어까지 철저했지만 유리한 병종이라면 갑옷 따위 없다.

무장과 방어구가 다양하니만큼 관중마다 좋아하는 취향이 달랐다. 예로 티투스는 트라키아인을 좋아했고, 클라우디우스는 레티아리를 싫어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검투사들은 다음과 같다.
다음은 특수한 상황에만 나오는 검투사들이다.

6.3. 여성 검투사

Gladiatrix[45]

여성 검투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는 문헌 기록을 남기는 로마 식자층이 남자들의 미덕[46]을 겨루는 검투 경기에 여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남성의 미덕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의 다음 시를 보면 당시 식자층 남성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여성 검투사들은 모든 훈련을 경험했고, 플로라 축제에서 트럼펫을 불 가치가 있지만 더 큰 꿈을 가지지 않고, 아레나에 나타나기를 원하지만 않는다면 정숙한 부인들이다. 당신은 투구를 쓴 여성에게서, 자신의 성을 버리는 여성에게서, 힘으로 쌓은 업적에 기뻐하는 여성에게서 얼마나 겸손함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략) 그녀가 교관이 그녀에게 보여준 대로 타격을 반복, 연습할 때 얼마나 씩씩거리는지, 그녀가 투구와 무릎을 감싼 두꺼운 나무 보호대의 무게로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보라. 그녀가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서 오줌을 눌 때 웃기지 않은가?”

이외에도 철학자 세네카,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 등을 비롯해 많은 로마 시대 지식인들이 여자들의 검투 경기를 비난하는 기록들을 남긴 것을 찾아볼 수 있고, 후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이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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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검투사들의 존재 여부와 생활 양식에 대한 정보들은 문헌 기록이 없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템즈 강 유역의 할라카르나소스[47]에서 발견된 두 여성 검투사의 시체와 함께 매장된 장비, 그리고 두 사람을 묘사한 부조 및 기록은 생활상을 추측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두 여성 검투사는 아마존 아킬리아라는 이름[48]을 사용하였으며, 상위 랭크의 검투사였다는 기록에서 당시 여성 검투사에게도 등급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또 이 부조는 이들의 신화적인 경기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승부의 경우 무승부로 끝났고, 둘 다 살아서 경기가 끝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콜레기아 이우베눔', '루두스 마그누스' 등의 당시 검투사 양성소에서 여성들의 훈련 공간이 발견되는 등, 분명히 여성 검투사들을 전문으로 양성하는 곳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구역의 비중 차이를 볼 때 흔하지는 않고 대단히 드물게만 열렸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로마 제국이 굉장히 넓었으니만큼 지역별로 또 격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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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서 발견된 여성 검투사상은 아예 상의 탈의 상태로 나오는데, 이런 자료는 또 여성 검투사들이 성적 대상으로서 취급받았을 거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젖가슴을 드러낸 모습은 여자 노예들에게도 흔했기에 하급 여자 검투사를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역시 아직까지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당시 여자 검투사들의 위상이나 경기 방식을 완전히 추측하기는 힘들다.

아무튼 여성 검투사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이 직종이 실존하기 때문인지, 로마 시대를 다루는 소설인 《폼페이 최후의 날》에선 여성 검투사 출신의 조역이 등장하기도 한다.[49]

7. 기타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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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부르두르에서 발굴된, 검투사 묘지의 비석에 새겨진 검투사들의 격투 모습

8. 대중 문화 속의 검투사

꼭 주인공이 검투사일 필요는 없다. 투기장이 주요 장면으로 묘사되는 작품이면 족하다. 단, 후자의 경우 어떤 맥락에서 투기장이 묘사되는지 기술할 것.

8.1. 영화

8.2. 드라마

8.3. 만화

8.4. 소설

8.5. 게임

9. 관련 문서


[1] 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 범죄자 출신 검투사들이 올린 인사로 추정되고 있다. [2] 주로 바바리사자 [3] 주로 정치인, 특히 로마 시장이 맡았다. [4] 때문에 검투사를 현대의 AV 배우에 비유하기도 한다. 업계 정상급에 오른다면 상당한 인기를 누릴 수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며 대부분의 경우 비참하게 된다는 점 등 유사점이 많다. [5] 죽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장례식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6] 서기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로마로 끌고 온 다키아족 포로들 중 일부가 콜로세움에서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 역할을 맡아야 했다. 5만 명 전원을 검투 노예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며칠간 경기를 치러도 될 정도로 수가 많았다고 한다. [7] 다만 콤모두스가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누가 봐도 뻔한 봐주기 경기가 아니라 상대 검투사가 죽어라고 싸워도 답이 없어서 항복하는 식이었다고. 그 정도로 콤모두스는 검투사로써 매우 강했다. [8] Sacramentum gladiatorium, Petronius Satyricon 117 [9] The Roman Games, Alison Futrell, 2006 [10] De Speculates, Tertullian, 22, cited by Futrell, 2006. [11] 그리스에서 행해지던 고대 올림픽 로마 제국에서도 계속 개최하고 있었지만 기독교의 영향 이후 점점 쇠퇴하게 된다. [12] 5세기에조차 검투 경기가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와 논쟁을 벌이던 심마쿠스가 주도한 경기였는데, 그냥 검투 경기도 아니고 게르만족 노예를 끌어내 치른 경기였다. 경기 결과는 노예 검투사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13] 전차경주도 마찬가지였다. [14] 이는 오늘날의 프로 격투기에서 체급을 나누는 것이나, 두뇌 스포츠나 PvP 온라인 게임에서 Elo 레이팅을 매겨 되도록 비슷한 레이팅인 플레이어끼리 매칭하는 이유와 같다. [15] 굳이 레티아리우스에게만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레티아리우스는 투구를 쓰지 않아 관중이 표정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6] BBC의 2003년 다큐멘터리에서는 서로를 잘 아는 두 검투사가 벌인 일종의 연극으로 해석하고 있다. 두 검투사는 데뷔 초 같은 양성소에서 한솥밥을 먹던 친구 사이였다가 서로 다른 양성소로 가서 갈라진 후 해당 경기에서 재회하는데, 서로 전투 방식과 기술을 잘 아는 덕분에 치명상을 피하면서도 치열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단순히 죽이는 것보다는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서로를 제압하는 쪽이 더 어려우므로, 양쪽 모두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다고 해석하고 있다. [17] 특히 언덕으로 [18] 글라디우스는 베기의 위력도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방진을 짜서 일부러 좁은 공간을 만든 뒤 복부를 향해 찌르기 공격을 하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경기를 위해 복부의 방어력이 일부러 약화되는 검투사에게 매우 치명적인 공격이다. [19] 단수형은 베스티아리우스(Bestiarius) [20] 작자 미상의 중세 우화집 베스티아리 #와는 발음이 비슷해도 스펠링이 다르다. 검투사를 뜻하는 베스티아리는 Bestiarii 이고 우화집 베스티아리는 Bestiary 이다. [21]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산 아프리카코끼리는 아니고, 북아프리카코끼리라고 어깨 높이 2미터쯤의 작은 아종이며 현재는 멸종했다. 물론 현생 아프리카코끼리와 비교할 때나 작고 약했지, 사람보다는 당연히 훨씬 더 강했다. [22] 로마 시민권은 남성에게만 적용됐기 때문에, 여성은 로마 시민의 가족이라도 사형이 확정되면 이런 처벌을 완전히 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로마 시민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방식으로 사형당한 사례가 있다. [23] 후대에 창작된 소설들 중 로마 시대를 다루는 폼페이 최후의 날과 쿼 바디스에서 사실상 처형당하라고 밀어넣어진 주인공과 기독교도들이 강제로 베스티아리 취급을 받으며 맹수와 대치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폼페이 최후의 날의 주인공의 경우 그나마 단검이라도 쥐어졌고 사자가 뜻밖에도 공격하지 않아서 살아남았지만 쿼 바디스의 기독교도들은 모두 빈약한 최소 무장마저 없는 맨몸 상태로 경기장에 들이밀어졌으며, 끝내 맹수들에게 죽임당한다. [24] 해당 이름은 그리스어로, 라틴어로는 안드로클루스(Androclus)이다. [25] 복수형은 레티아리 Retiarii - 라틴어로 그 뜻은 '그물꾼 Net-man'을 의미한다. [26] 겉옷을 입는 경우는 게이 또는 여장남자 컨셉이 붙게 된다. 검투사의 사회적 계층 중에서 최하층이었다고 한다. [27] Baker, Alan (2002). The Gladiator: The Secret History of Rome's Warrior Slaves. Da Capo Press. p.55 [28] Junkelmann, Marcus (2000). "Familia Gladiatoris: The Heroes of the Amphitheatre", Gladiators and Caesars: The Power of Spectacle in Ancient Rome. p.51, 59–6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9] 현대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용 재현이기에 레티아리 역을 맡은 사람의 삼지창은 끝이 둥근 면보로 감싸는 식으로 마감 처리되어 있고 세큐토레스 역을 맡은 사람도 메이스는 안 쓰고 방패만 쓴다. 참고로 세큐토레스가 초반에 레티아리를 상대하다가 그물을 놓치게 만들자 레티아리가 삼지창으로 견제하고 세큐토레스는 방패로 공격하다 결국 엎어치기로 레티아리 승. 무기의 의미가 보다시피 대회 도중 그물을 잃으면 레티아리의 위력이 확 절감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리치가 긴 무기(삼지창)를 가진 특성상 상대를 보다 쉽게 견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영상에서도 잘 나온다. [30] Auguet, Roland (1970), Cruelty and Civilization: The Roman Games, p.49 [31] 복수형은 라퀴에아리(Laquearii). 라틴어로 '덫꾼/올가미꾼(Snarer)'을 의미한다. [32] 복수형은 미르밀로니스(Murmillones). [33] 각 병종의 3D 재현 영상에서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체감할 수 있다. [34] 또는 트락스 Thraex - 트라세스 Thraeces [35] 복수형은 디마카에리(Dimachaeri). [36] Nossov, Konstantin (2009). Gladiator: Rome's bloody spectacle. Osprey. p. 208. [37] 복수형은 시소레스(Scissores). 저 철자는 현대 영어로 검색하면 가위가 나온다. [38] 공구를 쓰는 손 쪽은 완전히 덮이기에 꼭 후크 선장 비슷한 느낌이 된다. 무장의 경우 제법 두텁게 껴입었다. [39] 2번째 영상에서 시소레가 반월 공구를 어떻게 전투에서 활용하는지 잘 나온다. 상대역은 가장 승률이 높은 그물을 쓰는 레티아리인데, 시소레 역이 공구를 쓰는 손으로 레티아리가 자기 쪽으로 던지는 그물을 잡아채서 역으로 뺏은 다음 공구와 검을 이용해 창을 걸고 막는 식으로 창도 무력화시킨다. 검과 팔보다 조금 긴 공구만 쓰는지라 리치가 짧은고로 시소레 역은 리치가 더 긴 무기를 쓰는 상대에게 처음부터 달려들기보단 거리를 재면서 간을 보다가 여차할 때 무기를 빼앗아 전력을 감소시키거나 무력화시킨다. 사실 상대 역 레티아리가 상대를 빨리 잡는 데 특화되어 있지 무기 뺏기면 취약한 직종이긴 하지만. [40] 복수형은 크루펠라리(Crupellarii). [41]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프락시모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받은 그 칼. 검투사 만화에서 가이우스랑 크레스켄스가 받은 그것과 동일. [42] Kyle, Donald G. Sport and spectacle in the ancient world. Vol. 5. John Wiley & Sons, 2014. pp. 302 [43] 복수형은 에퀴테스(Equites). [44] 한쪽에만 갑옷류를 걸치고 반대쪽은 벗는다. [45] 복수형은 gladiatrices. [46] 전투 기술과 체력 [47] 고대에는 비슷한 이름의 도시가 많았다. [48] 예명으로 추정된다. [49] 이 여자는 해당 소설의 레귤러 + 서브 히로인인 나디아의 여주인으로, 검투사 출신의 남편과 함께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현역 검투사 시절에 황제 앞에서도 경기를 했던 전적이 있으며 이를 자랑으로 삼는다. 작중에서도 그녀의 전투력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세다고 묘사된다. 소설 묘사상 검투사들이 거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묘사되니 이 전직 검투사였던 아줌마도 목숨을 건 혈투를 많이 거쳐봤고, 그런 상황들을 거쳐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단련되었을 것이다. 현재는 검투사 일을 하지 않으며 그 대신 남편과 함께 술집을 경영하는 걸로 봐선 그녀 역시 노예 출신 → 자유민 전철을 밟은 검투사거나 자유민이어도 돈 문제로 검투사를 하다가 그만둔 사람인 듯. 성격도 매우 억세고 잔혹해서, 자기 노예인 나디아에게 학대 수준의 폭행을 해댔다. 덕분에 당대 소설 등장인물치곤 여성 검투사라는 이례적인 기믹을 지녔긴 하나 소설 포지션상 그냥 조역 + 악역이다. 그녀에 대해서도 여성 검투사로서의 면모가 많이 묘사가 안 되는 걸 보면, 여성 검투사 직종에 대한 자료가 지금보다도 부족한 시기에 만들어진 소설상의 등장인물이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50] 이런 식의 처형법은 영화 쿼바디스에서 잘 묘사되었다. [51]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면서 초기 신자들을 사자에게 물어죽이게 한 장소. [52] 거상은 라틴어로 콜로수스다. [53] 케임브리지 대학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교수. 로마 제국사(고대 말기) 전공. [54] 1693년판 번역본 [55] 보리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56] 아마도 오록스였을 것으로 보인다. [57] 다만 그외의 주인공의 배경 등등은 거의 판타지 수준이며, 작가 또한 이것도 어디까지 만화일 뿐이라서 고증에 크게 신경쓰지는 마라고 당부했다. 당장 주인공이랑 황제가 무협물에 나올 수준의 먼치킨이다. [58] 글래디에이터, 몬스터 헌터 시리즈, 맥팔레인 토이즈 [59] 자라모리스라는 파에그니아리와 글라디투스라는 파르물라리우스의 대결인데, 합을 주고받다가 파르물라리우스가 파에그니아리를 검으로 쓰러뜨리면서 파르물라리우스의 승. [60] 여기서 레이저 버나드가 대표적인 검투사 출신으로 사막왕국의 장군 직위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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