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라틴어: Gaius Flavius Fimb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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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4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시아 속주 페르가몬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아버지) 플라비우스 핌브리아(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군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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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단장.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살해하고 군대 지휘권을 확보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회유로 부하들이 대부분 술라 편으로 넘어가자 자살했다.2. 생애
아버지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는 플레브스 출신으로, 가문 최초로 호민관, 법무관을 거쳐 기원전 104년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민법에 정통했고 변호사들 사이에서 "완전히 무례하고 혀가 날카롭고 너무 뜨겁고 자기 연설에 도취된" 인간으로 여겨졌다고 밝혔다. 그는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 정계에 뛰어들었다.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파벌이 장악한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에게 가담했고, 삼니움족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찾아가서 마리우스파와 힘을 합치게 했다.마리우스와 킨나 등이 로마에 입성한 뒤 정적들을 숙청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기원전 97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그의 장남 푸블리우스를 추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핌브리아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플로루스는 그들이 서로가 보는 앞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고 서술했으며, 아피아노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아들을 죽인 뒤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밝혔다. 또한 핌브리아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를 길거리에서 살해했다.
기원전 86년 1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장례식에서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임을 맡고 있던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를 검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스카이볼라를 고발했다. 재판관이 고발 사유를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는 칼자루를 검으로 끝까지 치지 않았다."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위해한 것에 대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발칸 반도로 향했다.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플라쿠스와 그의 2개 군단의 공식적인 임무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술라를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출진했다고 한다. 헤라클레아의 멤논에 따르면, 플라쿠스는 원로원의 뜻에 따라 술라와 함께 미트리다테스 6세를 공격하기로 했다고 한다.
플라쿠스는 마케도니아를 통과하여 비잔티움으로 이동한 뒤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칼케돈에 진입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핌브리아와 갈등을 벌였다. 매우 엄격한 지도자였던 플라쿠스가 폰투스군을 맹추격하려 하자, 핌브리아는 폰투스군이 떠나고 없는 도시들을 점령하고 약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플라쿠스는 핌브리아를 해임하고 로마로 귀국할 것을 명령했다. 핌브리아는 여기에 원한을 품고, 사령관이 칼케돈으로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비잔티움에 남아있던 병사들에게 플라쿠스가 전리품 일부를 숨기고 있다고 선동해 자기 편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플라쿠스는 도로 비잔티움으로 돌아가 핌브리아를 처단하려 했지만,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마저 핌브리아 편으로 귀순해버리자 칼케돈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니코메디아로 이동했다. 그 후 그곳의 우물에 숨었다가 핌브리아 추종자들에게 체포된 뒤 참수되었다. 잘린 머리는 바다에 던져졌고, 남은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방치되었다.
그 후 군대 지휘권을 맡은 핌브리아는 미트리다테스의 잔존 병력을 격파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격하여 페르가몬에서 포위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배를 타고 피타네 시로 달아났고, 이를 추격한 핌브리아군은 피타네를 포위했으나 미트리다테스 6세의 도주를 저지할 해군이 없어서 함대를 보유하고 있던 술라의 부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몰래 강화를 맺기로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피타네에서 배를 타고 빠져나온 뒤 기원전 85년 하반기에 다르다누스에서 술라와 만나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3,000 탈렌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70여 척의 함선을 술라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대신, 술라는 포로가 된 폰토스 병사들을 전원 석방하고 그가 폰토스 왕위를 계속 맡는 걸 용인했다.
한편, 핌브리아는 피타네 공략을 포기한 뒤 트로이 시로 향했다. 트로이 주민들은 술라에게 항복하기를 원했지만, 핌브리아가 자신들을 우호적으로 대우하겠다고 약속하자 그에게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핌브리아는 곧장 시내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대거 학살하고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핌브리아는 아가멤논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10년이나 걸렸지만 자신은 10일만에 함락시켰다며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술라가 자신을 상대하러 이동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술라 쪽으로 향했다. 기원전 84년, 핌브리아는 티아테이라 시 인근에서 술라의 군대와 대치했다. 술라가 그의 직위가 레가투스에 불과한 점을 지적하며 자신에게 지휘권을 넘기라고 요구하자, 핌브리아는 검으로 답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집정관 플라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해 두려워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미 충분한 전리품을 약탈하여 욕심을 채운 상태라 핌브리아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술라에게 붙기로 했다. 핌브리아는 병사들이 대부분 술라 쪽으로 귀순해버리자 페르가몬 시로 가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단검으로 몸을 찔렀지만 좀처럼 죽지 않자 노예에게 목숨을 끊어달라고 부탁해 겨우 죽었다. 이리하여 핌브리아의 군대를 흡수한 술라는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마리우스파를 응징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격해 술라의 내전을 단행했다.
형제로 프라이노멘이 전해지지 않는 플라비우스 핌브리아가 있었다. 그는 술라에 맞서 싸운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부관으로 활동하다가 술라에게 귀순하기로 한 장교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