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Gaius Claudius Pulcher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안티스피아(어머니)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동생) 클라우디아(여동생)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2년 |
전임 |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
동기 |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후임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여동생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기원전 213년 집정관 아피우스의 장남 아피우스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차남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84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삼남 가이우스는 기원전 177년 집정관, 기원전 169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가이우스의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알프스 부족인 살라시 족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는 노빌레스 가문 출신의 안티스피아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 가이우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고, 차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지지자로서 기원전 88년 법무관을 맡다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에게 추방되었고, 기원전 84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죽자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79년 집정관을 지냈고, 기원전 78년부터 기원전 76년까지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내다 기원전 76년 마케도니아에서 사망했다. 여동생 클라우디아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부인이 되었다.
그는 기원전 105년 재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04년 화폐 주조관을 맡았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고자 포로 로마노에 모인 귀족 무리에 함께 했다. 이때 사투르니누스 일당에 속했던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가 클라우디우스라는 인물의 집에 숨었다가 끌려나와 피살되었다. 이 '클라우디우스'는 그였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99년 수석 조영관을 맡아 호화로운 검투사 경기와 서커스를 개최했다. 이 서커스에는 코끼리가 대거 출현했고, 서커스 무대는 여러 색으로 칠해졌다. 기원전 95년 법무관을 맡아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한 총독들을 심판하는 임무를 맡았고, 시칠리아의 갈레사 시의 선거법을 개정하는 임무를 별도로 수행했다. 이후 수 년간 도로 관리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92년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원로원에 호민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대중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원로원은 풀케르의 보고서와 감찰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주장을 검토한 뒤 카르보가 "폭력적인 행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이렇다할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직후에 사망했을 거라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87년 대대장을 역임했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이탈리아의 18-19세기 골동품 수집가이자 역사가 바르톨로메오 보게시에 따르면,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가 그의 친자였다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