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라틴어: Lucius Iulius Caes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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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조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풀비아(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여동생)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4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후임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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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집안인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화폐 주조관을 맡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경력이 없었지만, 아버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대립이 격렬해지던 시기에 술라를 따랐다가 마리우스파 인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어머니는 기원전 125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딸 풀비아이며, 여동생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 안토니아가 있었다. 그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8촌 관계였다.기원전 90년 화폐 주조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77년 아시아 지방에서 재무관을 맡아 일리온의 아테나 여신을 기리기 위한 축제에 참가했다. 기원전 67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65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기원전 64년도 집정관에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와 함께 당선되었다. 그가 집정관이던 시기, 원로원은 집정관, 법무관 등 고위 행정관 후보자 수를 제한하기로 결의했다. 이듬해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살해에 관여한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민심은 고발자인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을 들었지만, 하늘에서 혜성이 나타나자 불길한 징조라는 이유로 재판이 중단된 뒤 다시 열리지 않으면서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기원전 63년 12월 5일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가 로마에서 체포된 인사들의 운명이 결정된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카틸리나 음모를 발본색원하는데 공을 들이던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원로원이 루키우스의 외할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살해한 아들 풀비우스를 처형 또는 자살 강요로 처리했던 사례를 들며 공모자들을 즉각 처형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필시 키케로의 이 발언에 모욕을 느꼈을 테고, 공모자들 중에는 여동생 율리아의 남편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도 있었지만, 결국 즉결 처형에 찬성했다.
기원전 52년 갈리아 전쟁을 단행한 친척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았으며, 카이사르가 베르킨게토릭스의 봉기를 수습하는 데 열을 올리는 동안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를 방어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한 후에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카이사르의 편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7년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기병장관으로서 로마를 다스리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의 삼촌 루키우스를 로마 시의 치안 담당관으로 정한 뒤 캄파니아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러 출전했다. 그러나 그는 이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늙고 허약했고, 이로 인해 로마 시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유발한 폭동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나중에 독재관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와서야 이러한 혼란이 수습될 수 있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루키우스는 중병에 걸린 채 나폴리에 있었다. 그 해 여름, 그는 키케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와 손잡고 안토니우스를 적대하는 돌라벨라를 칭찬했다.
"오, 나의 키케로. 돌라벨라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제 동생의 아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그런 가르침을 내렸다면, 우리는 무사했을 겁니다. 돌라벨라가 올바른 길을 걸으니 축하할 일입니다. 사실, 그가 당신의 집정관이 된 후에야 우리는 그를 집정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후 키케로와 함께 카이사르파와 해방자파와의 협상에서 중재를 맡았으며, 그해 연말에 원로원에 복귀한 뒤 카이사르의 퇴역병에 대한 토지 분배를 중단할 것을 제안해 승인받았다. 기원전 43년 2월 돌라벨라가 원로원의 승인 없이 아시아 속주를 점거하고 총독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를 살해하자, 그는 키케로 등이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돌라벨라 토벌을 맡기자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에게 맡기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무티나 내전 때 원로원이 안토니우스에게 보내는 권고 문구를 부드럽게 했다. 키케로는 전쟁(bellum) 대신 소란(tumultu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소란없는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전쟁 없는 소란은 없다."라며 모호한 용어를 사용해 상황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43년 3월 안토니우스에게 두번째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한 뒤, 원로원은 사절단에 루키우스를 포함했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무티나에서 패배하고 갈리아로 도주한 뒤, 그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지정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이로 인해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뒤 로마를 점거한 뒤 숙청을 단행했을 때, 그는 숙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의 여동생이자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가 루키우스를 자기 집에 숨긴 뒤 포로 로마노에서 아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독재자여, 나는 나 자신의 죄악을 밝히겠소. 나는 루키우스를 내 집에 숨겼고 여전히 숨기고 있으며, 당신이 우리 둘 다 처형할 때까지 숨길 것이오. 법령에 범죄자를 숨긴 자에게 그런 형벌이 내려지니 마땅히 그래야하지 않겠소?"
안토니우스는 길이 탄식하고 루키우스를 용서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루키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버지와는 달리 카이사르의 내전 때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에 대항했으며, 카이사르의 레가투스를 맡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패사한 뒤 사로잡힌 카이사르 장병과 노예들에게 매우 잔인하게 행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아군이 완패하고 소 카토가 자살한 뒤 카이사르에게 항복했지만, 그 해 말 카이사르를 따르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카이사르가 지시했다는 설, 그의 악행을 전해들은 장병들이 분노해 독단적으로 살해했다는 설이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