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라틴어: : Lucius Tarius Ru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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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피케눔 또는 달마티아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년 |
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동기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후임 |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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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행적
기원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말년에 피케눔에 토지를 대거 구입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 것을 근거로 피케눔 출신일 거리고 추정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때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한 달마티아의 리부르니아인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매우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군사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갖춰 옥타비아누스의 인정을 받고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인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선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주했지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급파한 구원 함대의 도움을 받고 전력을 재정비한 뒤 소시우스를 격퇴했다.기원전 17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선임되어 기원전 16년 상반기까지 도나우 강 하류 지대에 거주하던 사르마티아를 격파해 도나우강 너머로 몰아냈다. 기원전 16년 후반기에 로마로 귀환한 뒤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임기를 수행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치른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덕분에 큰 재산을 확보했고, 이를 와인 사업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피케눔에 정착한 그는 1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거금을 토지 구매에 사용했다. 그러나 훗날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상속인은 이 거대한 토지를 물려받기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빨리 얻으려고 독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가족 재판을 열고 아우구스투스를 이 재판에 초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아들이 유죄임을 확인하고 참석자들에게 아버지를 죽이려 한 아들을 마실리아로 추방하는 데 투표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타리우스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이를 맹세하도록 했다. 세네카의 저서 <관용에 대하여>에 따르면, 타리우스는 자신을 죽이려 한 아들을 용서하고 보조금을 계속 지급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