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 라틴어: Lucius Cornific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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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5년 |
전임 |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 |
동기 |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티투스 페두카이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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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에퀴테스 가문인 코르니피키우스 씨족 출신으로, 아버지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 전하는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는 기원전 52년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살해한 범인으로 고발한 인사들 중 한 사람인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였던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캄파니아에 주둔한 제7군단과 제8군단의 노병들에게 자기 편을 들도록 설득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와 함께 참여했다. 기원전 43년 로마를 장악한 옥타비아누스 치하에서 호민관을 맡은 그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주동자로 고발해 브루투스가 궐석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게 했다.
기원전 38년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버티고 있는 시칠리아를 공격하면서 시칠리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 해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메세나 해협에서 적 함대의 습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반격해 적 기함을 점거했고, 폼페이우스 함대는 기함을 빼앗기자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했다.
기원전 36년 시칠리아 동해아의 타우로메니움 인근 해안가에 상륙한 옥타비아누스는 근처 언덕에 숙영지를 세웠지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육군이 맞은편 언덕에 자리를 잡고 해군이 바다를 봉쇄해버리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겨 버렸다. 이에 활로를 뚫기 위해 해전을 벌이기로 한 옥타비아누스는 그에게 지상에 주둔한 3개 군단을 맡기고 본인은 해군을 이끌고 바다로 출격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뒤이은 해전에서 참패한 뒤 칼라브리아 해안으로 도주했다.
그는 타우로메니움 근처에서 한동안 대치했지만 해상 보급이 끊겨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아그리파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섹스투스가 급파한 적 기병의 습격에 시달렸고, 당시 분화가 일어나고 있던 에트나 화산을 지나가면서 병사들이 탈진했다. 결국 도저히 행군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섹스투스의 육군에게 둘러싸여 포위섬멸될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아그리파가 급파한 퀸투스 라로니우스의 3개 군단이 도착하자, 섹스투스는 포위 섬멸할 계획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코르니피키우스는 라로니우스의 군단과 합세한 뒤, 며칠간 병사들의 원기를 회복시킨 후 아그리파가 있는 밀레로 이동했다. 이후 시칠리아 내전이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그는 군대를 위기 상황에서 구한 공로로 개선식 때 코끼리를 타고 로마 거리를 행진할 권리를 얻었다.
기원전 35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가 그 해 중반에 사임했고, 아프리카 총독으로 부임해 아벤티나에 디아나 여신의 신전을 재건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