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12년의 로마 집정관에 대한 내용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12년 집정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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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48년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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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라틴어: Lucius Calpurnius Piso Caeson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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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조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아버지) 칼벤티아(어머니) 루틸리아(아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아들) 칼푸르니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8년 |
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
동기 |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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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감찰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다.2. 생애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 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조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11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100년 재무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칼벤티아는 갈리아 출신으로 플라켄티아 시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인 칼벤티우스의 딸이다. 사촌으로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뒤 재판을 치르지 못한 채 처형된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카테구스가 있었다.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동안 미성년자로서 재무관과 조영관을 역임했다고 한다.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캐나다의 고대 로마 역사가 토머스 로버트 섀넌 브로튼(Thomas Robert Shannon Broughton)은 저서 <로마 공화국의 행정관>에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정한 행정관에 취임 가능한 법적 연령을 고려했을 때 기원전 70년에 재무관을 맡았고 기원전 64년에 조영관을 맡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후 기원전 61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고, 모종의 속주에서 총독으로 활동하다가 기원전 59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로마로 복귀한 뒤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를 일삼은 혐의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게 고발당했다. 하지만 당해 집정관 중 하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원을 얻어낸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자신의 딸 칼푸르니아를 카이사르와 결혼시켰다. 카이사르는 이 결혼을 통해 강력한 위세를 갖춘 피소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삼고자 했고, 카이소니누스는 삼두정치를 결성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등에 업은 카이사르와 손을 잡음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기원전 58년, 그는 사위의 후광에 힘입어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친척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의 시아버지인 키케로에게 자신을 지지해준다면 원로원 회의에서 처음으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키케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그는 키케로와 완전히 갈라섰다. 호민관으로 선출된 클로디우스가 키케로를 카틸리나 음모 사건 때 음모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자들을 재판도 치르지 않고 처형한 것을 문제삼아 추방형에 처할 때 지지했으며, 원로원 의원들이 키케로에게 동정을 표하는 것을 금지했다. 키케로는 사위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등과 함께 그에게 찾아가 선처를 호소하려 했지만 문전박대당했다.
클로디우스는 자신을 도운 그에게 답례하고자 그에게 집정관 임기 만료 후 마케도니아 총독 직을 주고 그곳에서 원로원의 통제 없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줬다. 그는 연말에 마케도니아로 가서 기원전 55년 초까지 그곳을 통치했다. 당시 마케도니아에서 멀지 않은 테살로니카와 디라키움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키케로는 그가 속주민들을 심하게 억압하고 막대한 세금을 물렸으며 사원과 공공 장소에서 조각상과 그림을 약탈했고, 불법적인 세금을 내기를 원치 않은 사람들을 체포해 처형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키케로는 그가 다르다니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실컷 약탈하게 한 뒤 그로 인해 벌어들인 수익금의 일부를 자신에게 넘기게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르다니인들의 침략이 갈수록 거세지자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싸웠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으며, 마케도니아 상당수를 그들에게 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피소의 부하들이 그를 임페라토르라고 추겨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마케도니아에서 로마의 통치가 이어진 것을 볼 때, 그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던 키케로가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56년, 원로원은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서 속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피소와 가비니우스를 로마로 소환하자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의 제안에 대해 논의했다. 키케로는 이 제안을 지지하는 긴 연설을 하고 이를 책으로 출간해 두 총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다. 당해 집정관이자 아우구스투스의 계부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키케로의 연설이 지나치게 편파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원로원은 퀸투스 안카리우스를 마케도니아의 새 총독으로 선임하고 그를 로마로 소환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기원전 55년 초 로마에 돌아온 뒤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지만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칭송을 받았음에도 개선식을 거행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그 대신 키케로가 자신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 원로원에 불평했다. 이에 키케로는 공개 장소에서 그를 향한 비판적인 연설을 벌이고 이를 출간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키케로는 이 출간물에서 그의 사생활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야만인의 피가 흐르는 술 취한 사람, 음탕한 자, 무지한 자로 묘사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가 갈리아 출신의 상인 칼벤티우스의 딸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그를 '카이소니누스 칼벤티우스'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키케로의 이같은 비방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지원을 받은 그의 경력은 탄탄대로였고, 기원전 50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키케로는 감찰관을 맡았을 때의 그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하지 않았는데, 많은 학자들은 피소가 감찰관으로서 자기 일을 다했기 때문에 딱히 비판할 게 없기 때문으로 간주한다. 그는 이 시기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대립이 벌어졌을 때 중립을 택했다. 쿠리오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군대를 동시에 해산하자고 주장했을 때 이를 지지했으며, 내전만은 피하고 싶어하는 원로원 내 온건파들을 대변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끝내 카이사르를 향해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포하자, 그는 법무관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파바투스와 함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달려가서 카이사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리려 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이 먼저 카이사르에게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그 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고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하자, 그는 로마를 떠나면서 자신의 사위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오랫동안 피소를 향헤 "오만하고 잔인하고 완고하고 방탕하고 국가를 잘못 이끌어가는 괴물, 야수" 등 온갖 모욕적인 표현으로 비방했던 키케로는 이번만큼은 그에게 찬사를 표하는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피소는 그리스로 이동한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하지 않았고 양자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가을 히스파니아 원정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그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와 휴전을 맺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46년 원로원 의회에 참석한 그는 카이사르에게 대표적인 옵티마테스 인사였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사면해달라고 요청했다.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즉시 동의하며 카이사르에게 사면을 간절히 청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 등 여러 원로원 의원의 의견을 물은 뒤, 그가 로마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미적거리며 로마에 돌아오지 않다가 기원전 45년 5월 23일이 되어서야 로마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가 측근인 푸블리우스 마기우스 칠로에게 살해당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이틀 후인 3월 17일 원로원 회의에 출석한 그는 공공 비용을 들여 카이사르의 장례식을 공개적으로 치르고 고인의 유언장을 대중에게 발표하자고 주장해 관철시키고 장례식을 주관했다. 그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해방자'를 자처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의 갈등이 고조되자, 이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기원전 44년 8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폭군의 승리를 보지 않기 위해 조국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면서 안토니우스가 독재 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그가 훌륭한 연설을 해서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원전 43년 1월 1일에는 무티나 내전을 일으킨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하자는 키케로 등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내전을 막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장발의 갈리아'[1] 총독으로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 후 평화 협상을 위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등과 함께 무티나 인근의 군영지에 있던 안토니우스에게 가서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화해하고 무력 행동을 그만하라고 요청했지만, 안토니우스가 끝까지 갈리아 키살피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는 기원전 43년 3월 다시 안토니우스에게 평화 협상을 청하기 위해 사절로 가려 했지만, 원로원이 막판에 이를 취소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기원전 43년에서 몇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루틸리우스라는 인물의 딸인 루틸리아와 결혼하여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와 딸 칼푸르니아를 낳았다. 아들 루키우스는 기원전 1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칼푸르니아는 카이사르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