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라틴어: Lucius Caecilius Metell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6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조부)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형제)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형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8년 |
전임 |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
동기 |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
후임 |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라치오 인근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시를 건설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불카누스(Volcanus, 불의 신)의 아들 카이쿨루스의 후예로 전해지는 카이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에서 출세가도를 달려 집정관 계급까지 오른 평민 귀족( 노빌레스) 집안으로, 대를 이어 집정관 등 고위 행정관을 역임하며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아카이아 전쟁, 누만티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는 기원전 11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69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와 기원전 69년 법무관을 맡은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있었다.그는 화폐 주조관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언제 이 직책을 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화폐학자들은 원전 91/90년 또는 88년에 그의 이름으로 화폐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동료인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푸블리키우스 말레올루스와 함께 왕관을 쓴 여신 빅토리아를 앞면에 묘사하고 뒷면에는 패배한 적을 짓밟는 기병 장교를 담은 데나리우스를 주조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동전들은 동맹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특별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71년 법무관을 역임한 뒤 시칠리아 총독에 부임했다. 당시 시칠리아는 전임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의 가혹한 착취로 인해 민심이 불안정했고, 해적 피르가니온이 로마 함대를 격파하고 시라쿠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그는 군대를 수습한 뒤 바다와 육지에서 피르가니온을 물리치고 시칠리아를 떠나게 했다. 키케로는 베레스 재판에서 시칠리아인들의 변호인을 맡으면서 그가 시칠리아를 잘 수습했다고 칭찬했지만, 이와 동시에 그를 비롯한 메텔루스 형제들이 베레스가 무죄 방면되게 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시칠리아의 치안관들에게 베레스를 옹호하는 글을 로마에 보내도록 강요했고, 원고측 증인이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기원전 68년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취임 직후 사망했다. 사후 세르빌리우스 바티아가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 아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49년 호민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