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라틴어: Marcus Valerius Messalla Nig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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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04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증조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아버지) 팔라(아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아들) 발레리아 니그라(딸)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1년 |
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
동기 |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
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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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증조부는 기원전 161년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였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마니우스,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그 외에 두 사람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일각에서는 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했다고 알려진 정치인 '발레리우스 메살라'가 그의 아버지이거나 삼촌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아그노멘 '니게르(Niger)'는 '검은 머리'를 의미한다. 친척으로 루푸스(Rufus: 빨간 머리)라는 아그노멘으로 불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가 있었다.그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보다 약간 어렸다고 한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집정관의 취임 연령 제한을 설정한 법에 의거한다면, 그는 기원전 104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케로에 따르면, 기원전 80년 섹스투스 로스키우스가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마르쿠스 메살라'라는 인물이 그를 지지하면서 "내가 나이가 더 많았다면 직접 그를 변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키케로 당신에게 변호를 맡기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인물이 그인지 아니면 친척 루푸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일찍이 로마의 고위 사제단의 일원인 아우구르(Augur)로 선임되었으며, 그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문에는 그가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두 번 역임하고 재무관과 법무관을 맡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날짜와 세부 사항은 그가 로마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 법무관을 역임했다는 것 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62년, 그는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변호해달라고 키케로를 설득했다. 키케로는 그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밝혔고, 그런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술라의 변호를 맡아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기원전 61년,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가 집정관을 맡았을 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스캔들이 불거졌다. 클로디우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하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보나 데아(Bona Dea: 순결과 출산의 신) 여신에게 바치는 비밀제의가 열렸을 때, 남자는 절대로 출입할 수 없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여장한 채 카이사르의 집에 잠입하여 카이사르의 두번째 부인 폼페이아 술라와 밀회하려 했다가 발각되어 집밖으로 쫓겨났다. 카이사르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하녀들을 통해 소문이 점차 퍼지면서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다.
기원전 61년 1월 1일, 클로디우스는 신성모독을 저지른 혐의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등에게 고발당했다. 원로원이 법무관이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집행하려 하자, 호민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반대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클로디우스에게 적대적인 법무관들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려고 배심원들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소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민회가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니게르는 원로원이 배심원을 즉각 소집하여 재판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클로디우스가 신성모독을 저지른 게 분명하니 엄벌에 처해야 신들의 벌을 받지 않을 거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그를 탁월한 집정관이라고 호평했다. 그러나 클로디우스는 뒤이은 재판에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매수된 배심원들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농지법에 따라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에 합류했다. 기원전 58년 호민관 클로디우스에 의해 키케로가 추방되었을 때, 키케로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렇지만 1년 후 키케로의 집터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제안해 관철시켰다. 로마에서 돌아온 키케로가 자기 집을 복원하자 클로디우스는 이를 신성 모독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신들이 이를 용인해줬다며 키케로를 옹호했다.
비문에 따르면, 그는 집정관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5일 내에 차기 행정관 선거를 이끌 임무가 주어지는 인터렉스(interrex)를 3번 맡았다고 한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비문에 적혀있지 않아서 분명하지 않다. 또한 기원전 55년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된 뒤 잦은 범람으로 시민들을 힘들게 하는 테베레 강을 통제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속주민들을 착취한 혐의로 기소된 기원전 56년 법무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의 재판에 키케로,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등과 함께 변호를 맡아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기원전 72년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의 아내였다가 이혼한 팔라와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와 딸 발레리아 니그라를 낳았다. 코르비누스는 기원전 3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딸 발레리아 니그라는 기원전 43년 법무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결혼해 술피키아를 낳았다. 한편, 그의 누이 또는 사촌으로 추정되는 발레리아는 기원전 43년 보결 집정관 퀸투스 페디우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