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Rull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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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조부)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아들)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22년 |
전임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
동기 | 루키우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
후임 |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
임기 | 기원전 310년 |
전임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
동기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 |
후임 |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임기 | 기원전 308년 |
전임 |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동기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
임기 | 기원전 297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후임 |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
임기 | 기원전 295년 |
전임 |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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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 감찰관. 제2, 3차 삼니움 전쟁에서 맹활약해 로마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파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는 세노네스족과 클루시움간의 전쟁을 중재하는 로마 사절단의 일원이었다가 세노네스족과 마찰을 벌인 뒤[1] 로마 시민들에 의해 집정 무관에 선출되었다가 브렌누스의 로마 약탈을 초래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는 기원전 360년, 356년, 354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기원전 331년 조영관에 선임된 그는 최근 귀족 가정에서 돌연사가 빈번하게 일어난 원인이 여성이 남편을 독살했기 때문이라는 정보를 노예 여성으로부터 제공받고 이 여성들을 고발해 엄벌에 처하게 했다. 기원전 325년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에 의해 기병장관에 발탁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피리우스는 전투를 치르기 전에 닭 점괘를 쳐봤는데 결과가 좋지 않자 '신성한 닭'을 관리하는 사제와 상의한 뒤 신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룰리아누스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말고 숙영지를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정찰병들이 삼니움인들의 경계가 느슨하다고 보고하자, 룰리아누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삼니움 진영으로 진격했다.
로마군은 임브라니움 마을(위치 불명) 인근에서 대규모 삼니움군과 마주쳤다.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기 위해 몇 차례의 기병 돌격을 벌였으나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자,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을 맡고 있던 루키우스 코미니우스가 말에서 재갈을 제거한 뒤 새로운 돌격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룰리아누스가 이를 허락하자, 기병들은 말의 재갈을 제거한 뒤 훨씬 빠른 속도로 돌격했고, 삼니움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리비우스는 이 전투에서 삼니움족 20,000명이 전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군법에 따르면, 승리를 거둔 독재관과 기병장관은 전리품을 나눠 가져야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는 독재관 몫으로 돌아갈 전리품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그 후 독재관이 아닌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승리를 보고했다. 이에 격노한 파피리우스는 군대로 돌아와서 룰리아누스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려 했다. 룰리아누스는 가까스로 탈출해 로마로 피신했고, 원로원과 평민 모두가 룰리아누스를 용서해달라고 청원했다. 파피리우스는 룰리아누스를 기필코 죽여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룰리아누스와 그의 아버지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자 명령을 철회했다.
기원전 322년 루키우스 풀비우스 쿠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리비우스는 이 해에 독재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가 삼니움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기록과 룰리아누스와 쿠르부스가 삼니움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른 뒤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아풀리아에서 가져온 풍부한 전리품을 신전에 바쳤다는 기록을 동시에 소개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 파비우스의 개선식이 기록된 점을 근거로 두 집정관이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좀더 신빙성 높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21년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로마군이 멍에 아래로 기어가는 모욕을 받는 상황을 초래한 두 집정관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뒤 어떠한 공직 활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원로원은 룰리아누스를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5일 동안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하는 임무를 맡은 인터렉스(Interrex)에 선임했다.
기원전 315년 독재관에 선임된 그는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를 기병장관으로 선임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315년 그와 케레타누스는 아풀리아 방면으로 진군하여 사티쿨라를 공략한 뒤 소라로 진군해 포위공격했다. 그런데 정찰병들이 돌아와서 대규모 삼니움군이 집정관 퀸투스 푸블리우스 필로가 이끄는 로마군을 캄파니아에서 격파했거나 회피하고 라티움으로 진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룰리아누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라티움으로 달려가서 라우툴레에서 이들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어진 라우툴레 전투에서 기병장관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격파되는 등 로마군이 완패했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으며 케레타누스는 적장을 손수 죽이는 등 분전했으나 전사했다. 이후 새 기병장관으로 선임된 가이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가 이끈 지원군과 합세한 룰리아누스가 두 번째 전투에서 삼니움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여러 도시가 이 전투 이후로 삼니움 편으로 돌아선 점을 근거로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기록이 신빙성 높으며 리비우스는 로마군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룰리아누스는 기원전 313년에 독재관을 맡아 삼니움에게 넘어갔던 식민도시 프레겔라스를 탈환하고 반로마 성향의 귀족 200명을 로마로 데려와서 포로 로마노에서 참수했다. 이후 캄파니아로 진격해 칼라티아와 놀라 성을 공략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한 뒤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고대 기록들에는 그가 아니라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가 독재관을 맡았다고 기재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디오도로스가 착오를 일으켰거나 친 파비우스 가문 성향의 기록을 덮어놓고 믿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310년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로마의 동맹 도시인 수트리움을 포위한 에트루리아군과 대적했다.( 수트리움 공방전)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좀더 우세한 전과를 거뒀지만 포위망을 뚫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이에 룰리아누스는 키미니 숲을 돌파하여 에트루리아 영역 깊숙이 진격하기로 했다. 이 숲은 그 당시에는 사람이 절대로 지나갈 수 없다고 여겨겼고, 로마군은 단 한 번도 이 숲을 지나가지 않았다. 룰리아누스의 장교 중 한 명이 자신이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카에레에서 자라서 키미니 숲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서 숲을 정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룰리아누스의 허락을 받은 뒤 노예 한 명과 함께 숲을 통과한 뒤 움브리아의 도시인 카메리움에 도착하여 그곳의 원로원과 우호 조약을 맺고 로마 진영으로 돌아왔다.
룰리아누스는 부하의 성공에 고무되어 숲을 강행돌파하기로 했다. 이후 숲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에트루리아 전초기지의 감시를 피해 군대를 하루 만에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고, 키미니 언덕에 자리를 잡은 뒤 주변 시골에 식량 수십병들을 보내 닥치는 대로 약탈하게 했다. 그 지역 농민들이 민병대를 결성해 맞섰지만 모조리 격파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에트루리아인들은 대군을 일으켜 룰리아누스의 로마군을 향해 진격했다. 양측은 에트루리아 연맹의 주요 도시 국가 중 하나인 페루시아 인근[2]에서 대치했다. 로마인들은 숲 밖의 평원에 진영을 세웠고, 에트루리아인들은 숲을 빠져나와 로마 진영에서 적당한 거리에 전투 대열을 편성했다. 룰리아누스는 적지에 고립되어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가 낮다는 것을 눈치채고 에트루리아인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대신 부하들에게 하루 종일 진영에 남아 있으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새벽, 룰리아누스는 부하들에게 숙영지 바깥의 성벽을 파내고 흙을 사용하여 도랑을 메우라고 지시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에 작업이 완료되자, 룰리아누스는 이제 평평해진 성벽을 건너 완전히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에트루리아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몇몇 에트루리아인들은 맞서 싸웠지만, 대다수는 진영이나 가까운 숲으로 도망쳤다. 로마군은 적 숙영지에 공격을 퍼부은 끝에 날이 저물 무렵에 공략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날 6만에 달하는 에트루리아인이 죽거나 생포되었다고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수트리움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에트루리아군은 페루시아 전투에서 아군이 완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후 에트루리아 연맹의 페루시아, 코르토나, 아레티움이 평화 협약을 요청했다. 로마는 이들과 30년 휴전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은 군대 징집에 응하지 않는 자는 신의 처벌을 영원히 받을 것이라고 선포해가며 병력을 최대한 끌어모은 뒤 로마에 대한 항전을 이어갔다.
기원전 309년, 에트루리아인들이 또다시 대군을 모집했다는 소식을 접한 룰리아누스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에트루리아군을 물리치러 출진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양측은 티베르 강변의 바디모 호수에서 격돌했다. 전장이 매우 비좁았기 때문에, 보통 양 측면에 배치되었던 기병대는 이번만큼은 후방에서 대기해야 했다. 또한 양자는 서로에게 자신들의 용맹을 보여주기 위해 투창, 투석 무기를 교환하지 않고 곧바로 돌진했다고 한다.
로마군은 1열에 이어 2열과 3열을 잇따라 투입했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에트루리아군의 투지가 워낙 강렬했던 터라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했다. 온종일 치러진 격전으로 병사들이 탈진하자, 룰리아누스는 후방에 얌전히 있던 기병들에게 말에서 내린 뒤 최전선에 나아가라고 명령했다. 기병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도보로 수많은 시체와 값옷, 방패 등을 밟으며 달려들었고, 로마인들 만큼이나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던 에트루리아군은 또다시 적이 몰려오자 전의를 잃고 퇴각했다. 이리하여 바디모 호수 전투에서 승리한 룰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308년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삼니움의 공격을 받은 마르시족을 돕기 위해 출진해 마르시족과 함께 삼니움인을 격파했다. 이후 움브리아를 통과해 에트루리아로 진격하여 카피리온 요새를 공략한 뒤 테르퀴니아 시와 40년, 다른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1년 동안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반면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삼니움과 단독으로 싸웠고 데키우스는 에트루리아에 맞서 싸웠다. 또한 마르시족은 처음에는 삼니움 편에 서서 룰리아누스와 대적했지만 도중에 룰리아누스 편으로 돌아서서 룰리아누스가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전투에서 패배한 에트루리아인들은 무스에게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호소했다. 무스는 자기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기를 거부하면서도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군에 1년 급여를 지급하고 모든 군인에게 튜닉 2벌을 제공하는 대가로 1년 휴전에 동의했다. 에트루리아와 로마 사이의 이웃인 움브리아인들은 로마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에트루리아를 굴복시킨 로마가 자신들 마저 복속시키려 들 거라 여겼다. 이에 일부 에트루리아인들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병력을 편성한 뒤 에트루리아에서 로마로 돌아가던 무스를 저지했다. 그동안 다른 병력으로 로마를 급습해 타격을 입히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웜로원은 삼니움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던 룰리아누스를 긴급 소환해 움브리아인을 저지하게 했다.
룰리아누스는 며칠간 강행군한 끝에 페루시아 남동쪽의 움브리아 시인 메바니아에서 움브리아군과 마주쳤다. 움브리아인들은 로마군이 숙영지를 짓는 동안 급습했다.[3] 그러나 이어진 메바니아 전투에서 로마군이 완승을 거뒀고, 움브리아인들은 죽은 자보다 사로잡힌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후 로마군이 삼니움족과의 전쟁에 전념한 덕분에 대부분의 움브리아 도시들은 당분간 로마의 공세에서 벗어났지만, 움브리아 남쪽 끝의 오트리쿨룸 만은 이 시기에 로마와 동맹을 맺고 움브리아, 사비나, 아게르 팔리스쿠스 사이의 국경 도시로서 전략적 기능을 수행했다.
기원전 307년, 원로원은 당해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룰리아누스의 임페리움을 6개월 연장하기로 했다. 룰리아누스는 알리파에로 쳐들어온 삼니움인과 맞붙어 격파하고 그들의 진영을 포위했다. 삼니움인들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자 그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옷 한 벌만 입은 채 멍에 아래로 지나가라고 명령했다. 이는 카우디움 협곡 전투 당시 로마군이 겪었던 굴욕을 복수한 것이었다. 이때 포로들 중에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헤르니키인 몇 명이 있자, 그는 이들을 로마로 보내 이들이 징집벙인지 삼니움을 위해 자진해서 가담했는지 조사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헤르니키인들은 로마가 장차 자신들을 징벌하러 들 거라 여기고 반기를 들었다. 룰리아누스는 급히 삼니움을 떠났고, 삼니움인들은 이 때를 틈타 칼라티아와 소라를 공략하고 로마 수비대를 포로로 삼았다.
기원전 304년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된 그는 로마를 구성하는 부족들에 땅이 없는 수많은 시민을 포함시켰지만, 이들 시민을 4개 부족으로 제한해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국한시켰다. 또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감찰관을 맡는 동안 시행했던 조치들 중 논란이 많았던 조항들을 취소시켜서 귀족들로부터 "막시무스(Maximu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매년 7월 15일에 에퀴테스들이 시내를 행진한 뒤 라틴 전쟁 당시 로마에 승리를 안겨준 것으로 알려진 쌍둥이 형제 신 디오스쿠로이를 기리는 행사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기원전 301년 에트루리아인들과 마르시인들이 로마를 대대적으로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로원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를 독재관에 선임했다. 이때 선임된 기병장관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라는 설과 룰리아누스라는 설이 제기되는데, 어느 쪽이 맞는 지 불분명하다. 이 '기병장관'은 코르부스가 로마로 잠시 돌아와서 조점술을 행하던 때에 에트루리아군과 맞붙었다가 패배해 많은 병사를 잃고 군기 마저 빼앗겼다. 이에 로마 시민들이 동요하자, 코르부스는 군영으로 돌아와서 군대를 성공적으로 수습한 후 에트루리아인들을 물리친 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로마 연대기 작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와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에 따르면, 룰리아누스는 기원전 299년 만장일치로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전시라면 이 직책을 맡겠지만 지금은 평시이니 맡을 수 없다며 거부했고, 이에 원로원은 그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를 조영관으로 선임해 기근으로부터 로마 시민을 구하게 했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이 두 역사가의 기록을 인용하면서도 실제로 조영관을 맡은 이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막시무스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였다며 잘못된 것으로 간주했다.
기원전 297년, 로마 시내에 에트루리아인과 삼니움인이 거대한 군대를 일으켜 로마를 향한 합동 공세를 개시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로마인들은 제2차 삼니움 전쟁 당시 맹활약한 명장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만장일치로 집정관에 세우려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으며, 단독 집정관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8년 동료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세워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그제야 받아들였다. 이후 에트루리아로 가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의 로마군을 인계받았다.
그러던 중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에트루리아 남쪽 도시들인 수트리움, 팔레리, 네피의 사절들이 로마에 찾아와서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이 로마에 평화 협약을 호소하기 위한 사절을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원로원은 룰리아누스에게 에트루리아에서 삼니움으로 이동해 무스와 연합하여 삼니움족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룰리아누스는 지시에 따라 남하했지만, 삼니움족은 그가 무스와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극비리에 파견했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삼니움 장군은 로마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고 지휘관 역시 수많은 승리를 거둘 정도로 지휘력이 탁월한 만큼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그 대신, 적이 방심한 채 남하하고 있을 때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급습해 큰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이에 따라 마테세 산맥의 티페르눔 마을 인근 계곡에 매복한 채 룰리아누스의 로마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삼니움족이 매복에 능하다는 것을 지난 전쟁을 통해 확실히 파악하고 있던 룰리아누스는 티페르눔 계곡의 지형이 매복 공격에 적합한 것을 보고 적이 숨어있을 수 있다고 판단해 정탐 능력이 뛰어난 정찰병들을 파견해 적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정찰병들이 돌아와서 적이 숨어있다고 보고하자, 룰리아누스는 적의 작전을 역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직 집정관이며 현재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고 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다른 산길을 통해 적의 배후로 돌아가게 했다. 이후 적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강행군하다가 계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각형 방진을 결성한 뒤 계곡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삼니움인들은 적이 매복을 눈치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다고 보고 전 병력을 동원해 로마군을 사방에서 에워싸서 공격했다. 사전에 강력한 방진을 갖춘 로마군은 결연히 맞섰지만, 삼니움족이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악착같이 몰아붙이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룰리아누스는 적의 중앙 대열을 돌파하기 위해 후방에 대기중이던 정예병들을 투입했다. 이들은 한동안 훌륭한 검술을 발휘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삼니움족이 전열을 유지한 채 맞대응하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 때, 바르바투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삼니움족 후방의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삼니움족은 이들이 또다른 로마군 집정관 무스의 군단이라고 오판하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도주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3,400명을 사살하고 830명을 생포했으며, 23개의 군기를 확보했다. 한편, 무스는 티페르눔에서 수백 km 떨어진 말벤툼에서 삼니움족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아풀리아인들을 말벤툼에서 격파했다. 룰리아누스는 티페르눔 전투에서 삼니움인들을 패퇴시킨 뒤 무스와 합류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4개월동안 삼니움족의 여러 마을과 농지를 파괴했지만, 삼니움족이 전투에 불응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캄파니아의 겨울 숙영지로 귀환했다.
기원전 296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가 새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전직 집정관 룰리아누스와 무스는 총독의 자격으로 6개월간 삼니움 전선에서 임페리움을 행사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카이쿠스가 에트루리아 전선에서 에트루리아군과 대결하는 동안, 비올렌스는 삼니움 전선으로 가서 룰리아누스, 무스와 함께 삼니움 각지를 황폐화했다. 이에 삼니움 장군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는 다른 장군들에게 오로지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에 전념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특별히 차출된 정예병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이동해 그들을 삼니움 편으로 끌어들였다.
비올렌스는 삼니움에서 3개 요새를 공략한 뒤 루카니아 평민들의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룰리아누스를 루카니아 쪽으로 파견하고 무스에게 삼니움의 농촌 지역을 계속 약탈하게 했다. 그러던 중 동료 집정관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향해 에그나티우스와 대적했다. 그 후 겨울이 다가올 무렵에 삼니움 전선으로 귀환한 비올렌스로부터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북상하여 카이쿠스와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에 따른 뒤 카메리눔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296년 말, 삼니움-에트루리아-움브리아인들이 대군을 편성했고 켈트계 종족인 세노네스족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는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네 개의 종족 연합군과 맞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마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가장 뛰어난 군사령관으로 인정받고 있던 룰리아누스를 기원전 295년도 집정관에 재선임하고, 이례적으로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낙점했다. 여기에 비올렌스를 집정관에 재선시켜서 룰리아누스와 함께 하도록 했다. 하지만 룰리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한 동지인 푸블리우스 데키무스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비올렌스의 임페리움을 1년 연장해 삼니움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가 로마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카메리눔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세노네스족의 습격을 받았다. 바르바투스는 방어에 좀더 유리한 언덕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려 했지만 적에게 포위되어 궤멸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세노네스족은 전사한 로마인의 머리를 말 목에 걸거나 창에 꽂았다고 한다.[4] 다만 바르바투스 본인은 목숨을 건졌다. 룰리아누스는 생존병들을 수습한 뒤 무스의 군단과 합세했다.
이후 센티눔에 주둔하고 있는 적군을 향해 진군하던 중, 적진에서 탈영한 3명의 병사가 찾아와서 연합군의 계획을 보고했다. 삼니움족과 세노네스족이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는 동안,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은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는 동시에 로마 진영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룰리아누스는 그 계획이 실행된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와 에트루리아 사이의 국경 지대를 지키고 있던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에게 전령을 보내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하라고 지시했다. 두 장군이 이에 따르자, 에트루리아인들은 자국의 시민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움브리아인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에 대해 "센티눔의 삼니움과 세노네스족의 규모는 로마군과 대등했으며, 전장을 떠난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의 숫자 역시 이와 동등했다. 만약 그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로마인에게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윽고 센티눔 평원에서 마주친 양군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우고 대치했다. 삼니움 지휘관 에그나티우스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세노네스족 지휘관은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이 돌아올 때까지 전투를 미루려 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승부를 보고 싶었던 로마군이 기병대를 지속적으로 보내 도발하자, 삼니움과 세노네스족은 당장 전투를 벌이자고 강권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로마군과 대치한 지 사흘째 되었을 때 언덕에서 내려와 전투 대형을 형성했고, 룰리아누스와 무스의 로마군 역시 전투 대형을 갖췄다. 이후 벌어진 센티눔 전투에서, 룰리아누스는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로마군의 대승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전투가 끝난 뒤 동료 집정관 무스가 대열이 무너지려는 아군을 수습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신이 로마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를 서원하는 데보티오(Devotio)를 행하다 전사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시신을 로마에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일부 전리품을 불태우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룰리아누스는 뒤이어 페루시아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3,000명을 죽인 뒤 로마로 귀환하여 삼니움, 에트루리아, 켈트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그 후 그는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 전역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센티눔 전투의 승장으로서 오래도록 명성을 날렸다. 기원전 292년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집정관에 선임되었을 때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고, 아들이 삼니움족의 급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 등 고전하자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합류한 뒤 삼니움족을 물리쳤다. 이때 지난날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굴욕을 안겨준 삼니움 지휘관 가이우스 폰티우스를 체포한 뒤 로마로 끌고 와서 처형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이 기록은 리비우스가 로마에게 굴욕을 안긴 적장이 응징당하는 장면을 연출해 로마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자 각색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룰리아누스는 노년기에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맡는 등 원로로서 존경받았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가 죽자 사람들이 장례 비용을 대신 지불하려 했지만, 아들 구르게스는 이를 거절하고 자기 돈으로 공개 장례식을 거행한 뒤 로마 시민들에게 음식과 기부금을 분배했다고 한다.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는 기원전 292년, 276년, 26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파비우스 전략을 구사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그의 증손자다.
[1]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세노네스족 귀족을 살해한 뒤 로마로 달아났다는 이야기와 클루시움 수비대에 가담하여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기재했다.
[2]
리비우스는 수트리움 인근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밝혔지만, 현대 학자들은 페루시아 쪽이 더 가능성 높다고 본다.
[3]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또다른 기록에는 룰리아누스가 병사들에게 연설하고 있을 때 움브리아인들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4]
리비우스는 카메리눔의 식량 채집원들이 움브리아족의 습격을 받아 패퇴했다는 또다른 이야기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