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오굴니우스 갈루스 라틴어: Quintus Ogulnius Ga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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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울루스 오굴니우스(조부) 루키우스 오굴니우스(아버지) 그나이우스 오굴니우스(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9년 |
전임 |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
동기 | 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
후임 |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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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2. 생애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플레브스 가문인 오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아울루스,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300년에 호민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96년 평민 조영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오굴니우스가 있었다.기원전 300년 형제 그나이우스와 함께 호민관에 선임된 뒤 폰티펙스와 아우구르의 숫자를 2배로 늘리고 평민도 로마 사제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파트리키들은 이 법안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평민들의 적극적인 찬성 덕분에 통과되었다. 기원전 296년 형제 그나이우스와 함께 조영관에 취임한 뒤 몇몇 대금업자를 재판에 회부해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여 확보한 자금으로 유피테르 신전 꼭대기에 전차를 탄 유피테르의 동상을 세웠으며, 피쿠스 루미날리스(Ficus Ruminalis: 아기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암늑대에게 키워질 때 그늘과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알려진 야생 무화과나무)에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290년대 후반 전염병이 유행하자, 원로원은 아스클레피오스를 에피다우로스에서 로마로 데려와야 한다는 신탁을 받아낸 후 10명의 원로원 의원을 그리스로 파견했다. 이때 그는 이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함께 했다. 사절들은 에피다우로스에서 아스클레피오스의 동상을 발견했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서 배로 옮길 수 없었다. 이에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뱀 한 마리가 아스클레피오스 동상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서 도시 전체를 기어서 항구까지 간 다음 로마 선박을 타고 오굴리누스의 천막으로 올라갔다. 이후 사절단이 로마로 돌아갔을 때, 뱀이 테베레 강의 어느 섬으로 들어갔다. 원로원은 그 섬에 아스클레피오스 사원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73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등과 함께 이집트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로마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우호 관계 수립 임무를 완수하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로부터 막대한 선물을 받은 뒤 귀국하자마자 재무부에 바쳤지만, 원로원와 민회는 임무를 잘 수행한 공을 인정하여 그들이 그 선물을 그대로 가지게 했다. 기원전 269년 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삼니움 지도자로서 로마에 반기를 든 롤리우스를 토벌하는 이무를 수행했다. 두 집정관은 룰리우스의 마지막 근거지가 있는 브루티움을 평정해 남부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로마의 정복을 완료했다.
기원전 257년, 시칠리아에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두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를 대신하여 라틴 축제를 주관하는 독재관에 선임되었고, 기병장관으로 마르쿠스 라이토리우스 플란키아누스를 선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