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Ruf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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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조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90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동기 |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퀸투스 카이디키우스 녹투아 |
임기 | 기원전 277년 |
전임 |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
동기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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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행적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푸블리우스와 그나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한다. 기원전 290년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함께 삼니움 전쟁에 투입되어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삼니움인들로부터 로마와 영원히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공물을 납부하고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을 종식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유명한 사람들에 대하여>에 따르면, 동료 집정관인 덴타투스가 전쟁이 끝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반면 대 플리니우스는 루피누스가 개선식을 2번 치렀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두 집정관 모두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추정한다.고대의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가 독재관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도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언제 독재관을 맡았으며 그 사유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277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을 때, 많은 이들은 그가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용감하지만 매우 탐욕스럽고 재산 강탈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라 여겨 꺼렸다. 그럼에도 피로스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정으로 인해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기원전 282년과 278년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는 그가 집정관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루피누스가 감사를 표하자, 루스키누스는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 없소. 나는 노예로 팔리는 것보다 강도를 당하는 편이 더 낫다고 봤을 뿐이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그는 동료 집정관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피로스 1세에게 가담한 삼니움, 브루티움, 루카니아를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불쿠스가 삼니움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루피누스는 루카니아, 브루티움을 공격했다. 이때 크로토네를 함락시키는 공적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는 부불쿠스가 루카니아, 브루티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기록만 있고 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루스키누스가 기원전 275년 감찰관을 맡은 뒤 그의 집에 10파운드의 은제품이 있다는 이유로 사치법을 어긴 혐의로 기소해 원로원 의원 직을 제명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는 유피테르 신전의 플라멘이었으며 술라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한 첫번째 인물이었다. 이 인물의 증손자는 그 유명한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