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라틴어: Gaius Aquillius Flor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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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아버지)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9년 |
전임 |
스키피오 아시나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후임 |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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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59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두 집정관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 투입되었고, 스키피오가 코르시카 원정에 나서는 동안 그는 시칠리아 섬으로 진격했다.그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한 부대는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다가 밀레 해전 후 로마의 편에 섰고 현재 카르타고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마켈라 시를 구원하는 임무를 맡았고, 다른 부대는 테르마에 시로 진격했다. 그러나 테르마에 시로 진군하던 부대는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하고 있던 하밀카르의 기습 공격을 받고 4,000 내지 6,000명이 궤멸되고 나머지는 패주하는 참패를 당했다.( 테르마에 전투) 그래도 그는 다른 부대를 이끌고 미티스트라티온 시의 주요 고지를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58년 전직 집정관으로서 지휘권을 계속 맡은 그는 하밀카르의 공세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가까운 곳부터 되찾으려 들 거라는 로마군의 예상과는 달리 시칠리아의 중심부인 엔나를 급습해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가볍게 함락시켰다. 하밀카르는 여세를 몰아 시라쿠사 남동쪽 해안 도시인 카마리나로 진격해 역시 손쉽게 공략했다. 카마리나는 전쟁 발발 때 카르타고와 연합해 로마를 대적했다가 로마의 편으로 돌아선 시라쿠사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아마도 시라쿠사를 압박해 카르타고와 손잡게 하려고 카마리나를 공략했던 것으로 보이나,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는 끝까지 로마를 지지했다. 이후 플로루스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