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Gurge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65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볼시니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손자)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92년 |
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
동기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임기 | 기원전 276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동기 |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
후임 |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
임기 | 기원전 265년 |
전임 |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
동기 | 루키우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
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파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는 당대 최고의 로마군 장성으로서 집정관, 독재관을 여러 번 역임하면서 삼니움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삼니움-세노네스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둠으로써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했다.그는 아버지가 센티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기원전 295년에 수석 조영관을 맡았다. 이 시기 여러 명의 로마 부인들을 간통 혐의로 벌금을 부과한 뒤, 그 돈으로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 옆에 비너스 신전을 지었다. 기원전 292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삼니움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삼니움의 영토로 진군하던 중 적의 매복으로 큰 피해를 입자, 아버지를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 초빙했다.
이후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삼니움 족을 격파해 삼니움인 20,000명을 사살하고 4,000명을 사로잡았으며, 여러 삼니움 도시를 공략했다. 이때 지난날 카우디움 협곡 전투 때 로마군에게 굴욕을 안겨줬던 가이우스 폰티우스 역시 사로잡혔고, 구르게스가 로마로 돌아와서 벌인 개선식 때 참수되었다. 또한 그가 개선식에서 사륜 마차를 타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말을 타고 그와 동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로마에게 굴욕을 안겨준 폰티우스가 개선식에서 처단되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로마 독자들에게 쾌감을 안겨주고 아들이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곤경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임의로 꾸며냈다고 주장한다.
디오 카시우스와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구르게스는 기원전 291년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삼니움의 코미니움 시를 포위 공격했다. 이때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가 현장에 달려와서 당장 물러나라고 강요했다. 이에 원로원에서 사절을 보내 제지하자, 메겔루스는 "집정관은 원로원의 명령을 받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통치를 행사하는 자다."라며 거부했다. 결국 구르게스는 물러나야 했고, 그는 코미니움 시 공방전을 진두지휘한 끝에 공략에 성공했다. 뒤이어 베누시아를 공격해 역시 함락시켰다. 메겔루스는 이 일로 기원전 290년 원로원의 지시에 불응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혐의로 고발당해 500,000 아스를 벌금으로 납부해야 했다고 한다.
기원전 276년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피로스 1세와 협력하여 로마에 맞서 싸웠던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움인들을 성공적으로 무리친 뒤 2번째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73년 퀸투스 오굴니우스 갈루스,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등이 포함된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로마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우호 관계 수립 임무를 완수하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로부터 막대한 선물을 받은 뒤 귀국하자마자 재무부에 바쳤지만, 원로원와 민회는 임무를 잘 수행한 공을 인정하여 그들이 그 선물을 그대로 가지게 했다.
기원전 265년 3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노예들이 주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장악한 볼시니아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도시를 포위 공격하던 중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67년 조영관을 역임하던 중 아폴로니아의 사절들을 모욕했다가 원로원에 의해 아폴로니아인들에게 넘겨졌지만 로마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들이 돌려보냈다. 손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맹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