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라틴어: Gaius Cornelius Cetheg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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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7년 |
전임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
동기 |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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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켈트족에 속한 인스브레스족을 격파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는 기원전 204년 집정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와 함께 고대 사료에서 언급된 코그노멘 케테구스(Cethegus)의 첫번째 사용자였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마르쿠스,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고 기원전 204년 집정관 마르쿠스의 조부 역시 마르쿠스이고 아버지는 마르쿠스였다. 학자들은 두 케테쿠스가 할아버지를 공유했으며 서로 사촌 관계라고 추정한다.기원전 200년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간 히스파니아 총독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의 대리 총독으로 지명되어 1개 로마 군단과 15개의 보조병 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총독이 떠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세데타니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세데타니족은 약 15,000명을 상실했다고 한다. 이후 로마로 돌아간 그는 기원전 199년 조영관에 선임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유별나게 사치스러운 경기를 조직했다고 한다.
기원전 197년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가 선거가 끝난 직후 시민들에게 포도주를 나눠줬다고 밝혔다. 그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원로원에 마케도니아로 갈 집정관을 제비뽑기로 뽑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민관이 큰 전쟁 중에 지휘권을 빈번하게 바꿔서는 안 되니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전직 집정관으로서 계속 전쟁을 이끌게 해야 한다고 반박했고, 원로원은 이에 따라 두 집정관에게 이탈리아에 남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한 그는 동료 집정관 루푸스가 리구리아인들을 통제하는 동안 갈리아인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케테구스는 인수브레스-케노마니-보이족 연합군과 대치했다. 그러던 중 보이족은 루푸스가 자신들의 영역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그는 케노마니족과 비밀리에 접촉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민키우스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리비우스에 따르면 35,000명의 인수브레스인이 섬멸되었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인으로서 갈리아-인수브레스 연합군의 사령관을 맡고 있던 하밀카르는 이날 사로잡힌 뒤 나중에 개선식에서 광장으로 끌려가 공개 처형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또다른 기록에는 하밀카르가 기원전 200년 크레모나 인근에서 법무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에게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고 기술되었다. 케테구스는 적에게 붙들려 있던 로마 주민들을 구출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동료 집정관 루푸스에게도 동일한 명예를 줄 것을 요청했지만 원로원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기원전 194년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하고 로마에서 열린 검투 경기장에서 원로원 의원을 위한 특별 의석을 할당했으며, 3년 전에 건립된 유피테르 신전을 봉헌했다. 기원전 193년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했지만,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본 뒤 어느 쪽이 옳은 지를 결정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는 기원전 149년 루시타니아 전쟁 때 루시타니아인들에게 땅을 준다고 속여 비무장 상태로 유인한 뒤 몰살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고발한 호민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연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갈바는 막강한 집안배경과 부를 활용해 처벌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