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라틴어: Marcus Claudius Marcel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3년 |
전임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
후임 |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평민 지파인 마르켈루스 가문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는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명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고 본다.기원전 188년 법무관, 기원전 185년 법무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기록상에 언급되지만, 누가 기원전 183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183년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두 집정관 모두 리구리아를 임지로 부여받았지만, 그는 나중에 갈리아 키살피나로 옮겨졌다. 그는 알프스 산맥 너머에서 아퀼레이아 인근으로 이동한 갈리아인들에게 당장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부족들은 이에 동의해 알프스 너머로 돌아갔는데, 그는 이들로부터 무기와 재산을 빼앗았다. 이에 분개한 부족민들은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은 집정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는데 무기와 재산을 빼앗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했고,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원로원의 지시에 따랐다.
그 후 이스트리아에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연말이 되자 로마로 가서 고위 행정관 선거를 조직했다. 이듬해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이스트리아에서 군대를 그대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그가 군대와 함께 리구리아 국경에 주둔했고 2,000명의 리구리아인이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가 아닌 그에게 귀순을 요청했다는 것뿐이었다. 원로원은 이들을 집정관에게 넘기라고 명령했고, 그는 이번에도 순종했다. 기원전 181년 원로원 의원들은 그에게 리구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아이밀리우스를 도우라는 지시를 내리려 했지만, 그는 이미 임페리움을 반납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이후 고대 기록에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3번 더 언급되었지만, 이 중 누가 기원전 183년 집정관인지 불분명하며, 어쩌면 셋 다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기원전 173년의 마르켈루스는 그리스에 사절로서 파견되어 델포이에서 열린 아이톨리아 동맹 집회에 참석해 분쟁을 조정했고, 펠로폰네소스에서 아카이아 동맹 회의를 소집한 후 그들 앞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페르세우스에 맞서 로마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기원전 169년의 마르켈루스는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휘하 레가투스를 맡아 페르세우스를 상대했으며, 또다른 마르켈루스는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10인 관리인의 일원이었다가 기원전 169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