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라틴어: Lucius Calpurnius Piso Caeson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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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07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누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2년 |
전임 |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동기 |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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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 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14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1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고 추정하며, 카리아 서부 해안의 프리에네 시에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된 것을 볼 때 아시아 총독을 맡았을 것이라 본다. 기원전 112년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ㅎ마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크레타 섬의 두 공동체인 이타노스와 이에라페트라 사이의 경계를 설정했으며, 그리스 철학 대학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을 때 원로원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 속주민을 상대로 착취를 저지른 혐의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고발당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따르는 프라이펙투스들이 막대한 사익을 챙기는 것을 허용해 큰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변호를 맡았는데, 재판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별다른 처벌을 받은 흔적이 없는 것을 볼 때 무죄를 선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7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구스 휘하 레가투스로 선임되어 킴브리 전쟁에 참여했다. 킴브리 부족 연합의 일부인 티구르니족이 주라 산맥을 등반한 후 아쟁 시 인근의 가론강변에 이르자, 카시우스와 피소는 군대를 이끌고 막아섰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는 자세한 경위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마군이 참패해 상당수의 병사가 전사했고 카시우스와 피소도 전사했다는 것은 전해진다.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레나투스가 이끄는 생존자들은 숙영지로 피신한 뒤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군수품의 절반을 바치고 인질을 보내는 대가로 풀려났다. 아피아노스는 그들이 멍에 아래로 기어갔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피아노스가 삼니움 전쟁 시기의 유명한 일화를 베꼈을 뿐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본다.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100년 재무관을 역임했다. 손자 루키우스 칼푸르니누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58년 집정관을 맡았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후에 갈리아 전쟁기에서 아내의 증조부에 대한 복수가 헬베티족과의 전쟁의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