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라틴어: Lucius Cornelius Lentu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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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73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버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형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9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동기 |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
후임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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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이래 로마의 패권하에 놓인 히스파니아 속주를 안정시킨 인물이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고대 사료에서 전해지는 렌툴루스(Lentulus)라는 코그노멘을 가진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327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였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 고위 행정관을 잇따라 맡은 렌툴루스 인사들과 이 인물간의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그의 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75년 집정관을 맡아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함께 피로스 1세와 전쟁을 벌였고,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37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201년 집정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있었다.그의 초기 경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비슷한 시기에 고대 사료에 여럿 등장한다. 기원전 211년 사르데냐의 법무관 겸 총독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언급되었으며, 기원전 209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군대의 레가투스(Legatus)로도 등장했으며, 기원전 209년 조영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비디누스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 누가 기원전 199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그가 역사에 확실히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206년경이다. 당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카르타고군을 이끈 한니발 바르카를 비롯한 바르카 가문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를 평정한 뒤 로마로 서둘러 돌아가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고자 했다. 그는 정복한 부족의 땅에 수비대를 두지 않고, 부족민들에게 군축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인질도 잡지 않는 등 최대한의 배려를 한 뒤 부관 렌툴루스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지명하고 로마로 향했다. 원로원은 자신들의 승인 없이 인사 조치가 내려진 것에 난색을 표했지만, 민회는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스키피오가 그렇게 떠난 뒤, 일레르게테스족, 인디빌리스족, 아우세타니족이 로마인들을 히스파니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반란군의 총규모는 3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렌툴루스는 루키우스 만니우스 아키디누스와 진압에 착수해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회전을 벌여 승리했다.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은 평화 협상을 제의했고, 로마인들의 요구에 따라 벌금을 내고 인질들을 넘겨주었다. 그 후 히스파니아에서 계속 총독을 맡다가 기원전 200년에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그가 임페리움(지휘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경기장에서 시민들에게 갈채를 받을 권리(오라토르, Orator)가 부여되었다.
기원전 199년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타풀루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치르기 위해 발칸 반도로 갔고, 그는 이탈리아에 남아서 감찰관 선거를 집행하는 등 내치를 다졌다. 그러던 중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원로원의 허가를 받고 출진하면서 현지군을 이끄는 법무관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에게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탐필루스는 이를 무시하고 반란을 일으킨 인수브레스족을 공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6,7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패주했다. 렌툴루스는 이 소식에 격분해 탐필루스를 규탄하고 로마로 쫓아보냈다. 이후 패잔병들을 수습해 반격할 준비를 갖췄지만,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새 집정관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에게 인수인계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196년, 렌툴루스는 원로원에 의해 이집트로 파견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의 침략으로 시리아 전역을 상실하고 주권 마저 상실할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는 리시마키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접견해 지금까지 이집트로부터 빼앗은 모든 영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이미 이집트와 이미 평화 협상을 하는 중이며 로마가 상관할 바 아니라며 무시했다. 그 후 렌툴루스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안티오코스 3세가 이집트에 끼친 피해에 대해 조사한 뒤 로마로 돌아와서 보고했다.
그 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고 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 이에 해당하는 예언을 찾아내고 해석해서 원로원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기원전 173년에 사망했다.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62년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