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라틴어: Titus Annius Lus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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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아버지)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루푸스(아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53년 |
전임 |
퀸투스 오피미우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동기 |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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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유서 깊은 노빌레스 가문인 안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안니우스 가문은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 권세가로 이름이 대단할 만큼, 로마 역사에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으로 유명하다. 이 가문 출신으로는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이자 철인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고모, 장모, 양모인 대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자 대 파우스티나의 외손자 콤모두스가 유명하나, 사실 이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거론된 사람은 뚜렷한 행적이 많지 않더라도, 집안을 노빌레스로 끌어올린 최초의 집정관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와 그 아들로 아버지처럼 집정관을 지낸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루푸스가 거론됐다.
출신 가문 안니우스 씨족은 전 지파가 플레브스 계급에 속한 평민 씨족이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오래되고 유서 깊은 라틴계 평민씨족들로, 다른 이탈리아의 플레브스 가문들 이상으로 로마가 해외식민지를 구축했을 때, 이베리아 반도인 히스파니아 일대로 이주해 터를 잡고, 활동 영역을 넓히는 등 적극적인 모습이 많았다. 안니우스 가문은 전통적으로 다른 이탈리아의 가문보다 라틴 식민도시 주민을 대변해준 것으로도 유명했다.
가문의 관습은 크게 튀지 않는 것 같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먼저 이들은 혈연적 유사성이 없는 사비니, 움브리아, 오스카 색채가 뚜렷했던 클라우디우스 일족과 공통점이 있다. 안니우스 가문은 전통적으로 남성 프라이노멘으로 티투스, 마르쿠스, 루키우스, 가이우스를 애용하면서도,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수에트리우스 가문처럼 아피우스를 남성 개인이름으로 많이 사용했다. 또 이들은 흔히 노멘의 어원 기원상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 이탈리아 중동부의 피케네 지방에 살았다는 라틴족 중 일부가 아니냐는 연구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문의 시조 신화 역시 가지고 있었다. 가이우스 안니우스 루스쿠스가 화폐발행감독관에 임명된 뒤 발행한 주화 묘사처럼 자신들을 여신 디도의 자매인 반지고리의 신이자 한 해의 여신 안나 페렌나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이 라티움 일대의 볼스카누스 가문 일원에서 갈라졌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루스쿠스는 기원전 218년 갈리아 키살피아(오늘날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토리노, 제노바 일대)에 로마인 정착도시를 건설한 사람으로 켈트족의 한 부류인 보이족의 봉기로 잠시 무티나로 피난을 떠난 마르쿠스 안니우스 루스쿠스의 후손 중 한명이다. 아버지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는 흔히 '마르쿠스의 아들(M.f)'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기원전 172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할 때, 로마 정부의 사절로 페르세우스를 만났고, 기원전 169년 식민도시 건설을 위해 조직된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직임 간격 기간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56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53년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133년, 루스쿠스는 원로원의 의사에 반하여 농지 개혁을 시도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맞서는 옵티마테스 세력의 저명한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라쿠스가 또다른 호민관이며 자신의 개혁을 계속 가로막는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민회를 통해 축출해 버린 것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그라쿠스를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을 받게 하려 했다. 이에 그라쿠스는 그를 민회에 소환하기로 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를 포로 로마노로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이에 대해 다음의 질문을 던졌다.
"만약 당신이 나를 모욕하고 불명예스럽게 하기로 결정했는데, 내가 당신의 동료 중 한 명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가 나를 옹호했다면, 당신은 그 사람 역시 관직에서 밀어낼 거요?"
그라쿠스는 이에 대해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고 민회를 해산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루푸스는 기원전 12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