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라틴어: Caius Aurelius Cot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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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조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0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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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을 선동해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봉기를 일으킨 카르타고인 하밀카르 진압 임무를 맡았다.2. 생애
그가 속한 아우렐리우스 씨족은 황금을 의미하는 라틴어 형용사 'aureus'에서 유래한 평민 가문이다. 조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기원전 252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저서에서 기원전 216년 한니발 바르카에 맞서 싸운 로마군에 소속된 레가투스(Legatus)로 한 번 언급되었다. 형제로 기원전 196년 재무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있었다.기원전 202년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을 맡았다고 전해지며, 기원전 200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제비뽑기를 한 결과 갈바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보내졌고, 그는 이탈리아에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도 카르타고에 돌아가지 않고 갈리아 키살피나에 은신하던 하밀카르가 로마인들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착수하느라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틈을 타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을 선동했다. 그는 로마가 조만간 한니발 바르카를 도운 그들에게 보복할 것이니 그 전에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수브레스족, 보이족, 케노마니족 등 갈리아 부족들과 일부 리구리아 부족들이 이에 호응에 반기를 일으킨 뒤 하밀카르를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하밀카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로마 식민도시인 플라켄티아를 기습 공격해 함락 후 철저하게 파괴했다. 여세를 이어가 크레모나를 포위했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치자 포위해서 굶겨죽이려 했다. 한편, 원로원은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듣고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코타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코타가 아직 갈리아 키살피나에 도착하지 않은 사이, 현지에 주둔한 2개 군단을 이끌던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가 크레모나로 진격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군과 리구리아군은 완패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1]
나중에 현장에 도착한 코타는 자기가 군공을 세울 기회가 사라진 것에 화가 나 푸르푸레오를 에트루리아로 쫓아보내고 로마에 반기를 든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들에게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각지를 약탈했다. 푸르푸레오는 이에 대응해 로마로 예기치 않게 찾아와서 원로원에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부 원로원 의원은 그가 배정받은 속주를 무단으로 떠났으니 불법이라며 반대했지만, 원로원은 그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연말에 로마로 돌아온 코타는 자신에게 동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개선식을 거행하게 한 원로원을 비판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
일부 기록에는 하밀카르가 이때 전사했다고 나와 있지만,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전하는 다른 기록에는 탈출에 성공한 뒤 여전히 로마에 맞서는 갈리아인들을 이끌다가 기원전 197년 민키우스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하고 생포된 후
개선식에 끌려가 광장에서 목졸려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