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Gaius Claudius Pul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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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67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그리스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7년 |
전임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 |
동기 | 대 그라쿠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히스팔루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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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조부이기도 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기원전 212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삼남이다. 형제로 기원전 185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기원전 184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있었다. 기원전 195년 아우구르의 일원이 되었으며, 기원전 180년 법무관 티베리우스 미누키우스가 사망한 뒤 그를 대신해 법무관에 선임되어 자신의 남편인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독살한 혐의로 기소된 호스탈리아 콰르타의 재판을 맡아 유죄를 선고했다.
기원전 177년 대 그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전년도의 두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가 전쟁을 벌였던 이스트리아를 임지로 배정받았다. 그는 전임 집정관들이 자기가 없는 사이 전쟁을 끝낼 것을 우려해 종교적 예식을 생략하고 이스트리아로 급히 가서 두 사람에게 속히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브루투스와 불소는 그가 로마에서 종교 서약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고,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브루투스와 불소가 이스트리아 왕 에풀로가 농성하는 네사틸리 시 공방전을 완료하기 직전에 새로운 군대와 함께 도착한 뒤 두 사람을 로마로 돌려보낸 후 네사틸리 시와 2개 도시를 공략하고 이스트리아 전체를 평정했다.
얼마 후 리구리아인들이 로마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은 그에게 리구리아인들을 물리치라고 지시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즉각 리구리아로 진군해 큰 전투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기원전 176년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에 부임해 무티나를 탈환하고 리구리아를 침공했지만, 나중에 군대를 새 집정관 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에게 넘겼다.
기원전 171년 마케도니아 원정에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우스 크라수스와 동행했으며, 기원전 169년 집정관을 함께 했던 대 그라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이 일을 워낙 열심히 해 많은 에퀴테스들이 재산을 추징당하자, 이에 원한을 품은 이들은 두 사람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트집을 잡아 기소했다. 그라쿠스는 이러다가 암살까지 당할까 우려해 그에게 망명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라쿠스의 인기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기소가 취소되면서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이후 포럼 바실리카 셈프로니아를 짓고 페르가몬 왕국과의 평화 협약을 비준했다.
기원전 167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종결된 후 마케도니아를 4개 공화국으로 개편하는 임무를 맡은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뒤이어 아카이아 동맹에 가서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어 로마를 적대하려 했던 일을 추궁하고 인질 1,000명을 로마에 바치고 배상금을 무는 대신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고 한다.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