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라틴어: Servius Sulpicius Gal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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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94년에서 기원전 191년 사이 ~ 기원전 137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조부) 세르빌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아버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장남)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차남)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4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
동기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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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루시타니아 전쟁에서 심각한 만행을 저질러 세인의 지탄을 받았지만 탁월한 웅변술과 탄탄한 집안 배경 덕분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집정관까지 역임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술피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씨족은 기원전 500년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른 이래 여러 집정관과 집정 무관을 배출했다. 코그노멘인 갈바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수에토니우스는 <12명의 카이사르의 삶>에서 갈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어떤 사람들은 창시자가 히스파니아의 도시를 길고 헛된 포위 공격 끝에 갈바눔(galbanum)으로 칠해진 횃불로 화공을 감행해 함락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그런 별명으로 불렸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장기간 질병에 시달리는 동안 갈베이(galbei), 즉 양모로 싸인 옷을 쭉 입었기에 그런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다른 이들은 그가 매우 뚱뚱해서 갈리아어로 "galba"라고 불렸다고 한다. 반대로 그가 참나무에서 사는 "galbs"라는 곤충처럼 말랐기에 그런 별명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갈바 지파는 2차 포에니 전쟁 이래로 술피키우스 씨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가문으로 성장했다. 조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는 기원전 211년과 기원전 200년에 집정관을 맡아 필리포스 5세의 일리리아 침공을 잘 막아냈다. 아버지 세르빌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기원전 187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집정관 선거에 4번이나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그는 기원전 166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와 친척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에서 그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보다 나이가 약간 많았다고 기술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194년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 그가 법무관을 역임한 시기와 기원전 180년에 제정된 렉스 빌리아 아날리스(Lex Villia annalis)에서 규정한 각 행정관에 오를 수 있는 최소 연령 제한에 따라 기원전 191년 즈음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에 학계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194년에서 기원전 191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 결론내렸다.
기원전 168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치르고 있던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해 피드나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아버지를 낙선시킨 파울루스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기원전 167년 파울루스의 군대가 마케도니아와 에페이로스 연맹을 굴복시키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병사들이 자신들에게 전리품을 별로 나눠주지 않고 국고에 대다수 전리품을 헌납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은 것을 이용해 병사들이 파울루스가 개선식을 치를 자격이 없으며 자신이야말로 개선식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게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등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원로원 의원들이 아이밀리우스를 지지한 덕분에, 아이밀리우스는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을 인정받고 사흘간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로마에서 뛰어난 웅변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사이에서 웅변으로 돋보였다고 한다. 그의 연설문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활동하던 시대까지 남아서 일부 내용이 리비우스의 저서에 실렸다. 키케로는 그의 연설문이 동시대의 다른 연설보다 건조하고 "고대의 냄새"가 강하며, 갈바는 웅변가로서 매우 재능이 있었지만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고 자신의 생격을 서면으로 공식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로마에서 처음으로 독특한 웅변 기법을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르면, 갈바는 청취자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유쾌한 여담을 연설 사이에 삽입했고, 그들의 연민에 호소했으며, 상대방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 연설을 일부러 질질 끄는 작전을 구사했다. 기원전 167년에 그가 파울루스의 개선식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을 때, 그는 파울루스 지지자들이 반박할 기회를 처음부터 주지 않기 위해 4시간 동안 연설해 원로원 회의가 해질녂까지 이어지게 조장했다.
키케로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실스크 숲의 타르 세입자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라일리우스는 훌륭하고 우아하며 신중하게 준비된 연설을 두 번 수행해 피고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지만, 집정관은 이를 묵살하고 조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라일리우스는 피고인에게 갈바에게 변호를 부탁하라고 권했다. 갈바는 별다른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혀 망설이지 않고 변호를 맡았다. 그는 법정에 있는 집정관이 다른 업무를 봐야해서 가봐야 한다는 말을 하는 그 순간까지 연설했다. 이후 집정관이 떠나자 연설을 재차 이어가 "각 부분이 방청객의 박수 소리로 끝날 정도로 강하고 인상적으로" 연설했다. 그날 피고인은 모든 배심원의 동의하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151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이듬해에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전임 총독 마르쿠스 아틸리우스는 루시타니아인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로마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 그는 군공을 쌓을 기회라고 여기고 즉시 움직였다. 우선 루시타니아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의 정착지를 포위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진격했다. 그러나 전초전에서 승리한 후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하다가 매복 공격을 받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전군의 절반 가량인 7,000명을 이 전투에서 상실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갈바의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는 패배의 원인이 갈바가 병사들을 지나치게 혹사시킨 탓이라고 지적했다. 로마군에서는 하루에 30km를 행군하는 것이 표준이었는데, 갈바가 적을 빨리 따라잡아서 섬멸시키고 싶은 욕심에 훨씬 긴 거리를 강행군하라고 독촉했다가 병사들이 완전히 탈진해버려서 매복 공격을 감행한 적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갈바는 전투에서 패한 뒤 카르모나로 후퇴했다. 한편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갈바를 도우러 이동하다가 투르디타니아에서 겨울 숙영하던 중 투시타니인들을 발견하고 즉시 공격해 4,000명을 죽였다. 이후 하데스 근처 해협을 건너 1,500명을 죽이고 루시타니아로 진군했다. 갈바 역시 장병들을 수습한 뒤 재차 루시타니아를 침공했다. 루쿨루스와 갈바가 동시에 쳐들어오자, 루시타니아인들은 더 이상 항전하는 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갈바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갈바는 그들이 전쟁을 일으켜야 했던 사정을 이해한다고 밝혔다.
"땅이 척박하고 극도로 가난하기에 이런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대들이 항복한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좋은 땅을 주고, 세 구역으로 나눠서 정착시킬 것이다."
기원전 150년, 루시타니아인들은 갈바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짐을 수레에 싣고 가족과 가축을 대동한 채 로마에 귀순했다. 로마 병사들이 족장들에게 루시타니아인들을 세 그룹으로 나뉘게 한 뒤 서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인도했다. 갈바는 루시타니아인들에게 무기를 반납하도록 한 뒤 병사들을 시켜 그들 주변에 참호를 파게 한 후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어린이, 여자, 노인은 노예로 삼게 했다. 이후 거의 모든 전리품을 자기 것으로 삼고 병사들에겐 적은 양만 주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 세 진영에 모인 모든 루시타니아인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3만 명이 죽었다고 하며,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8천 명이 죽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달아났는데, 그 중에는 로마에 원한을 품고 오랜 세월 루시타니아 전쟁을 벌인 비리아투스가 있었다.
갈바는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기원전 149년 그가 지난해 속주에서 벌인 만행을 놓고 법적 공방이 시작되었다. 호민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노예로 팔린 루시타니아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갈바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갈바는 자신과 인척 관계를 맺은 의원들을 동원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루시타니아인들이 먼저 평화 협약을 위반했기에 정당한 대응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보는 갈바가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주지 않고 독점한 점, 루시타니아인들에게 평화와 토지를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몰살시켜서 로마인의 명예에 먹칠한 점을 들어 공격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리보에게 호응하여 갈바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때 85세의 원로원 의원 대 카토가 나섰다. 그는 서두에서 "나이, 목소리, 힘, 노년 등 많은 것들이 나를 여기에 오지 못하게 막았지만 진정으로 그러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뒤, 갈바의 잔인한 조치는 로마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며, 갈바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성토했다. 기원전 153년 집정관이며 갈바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던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카토가 갈바를 증오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여론은 명망높은 카토의 주장에 감화되어 반 갈바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갈바는 다른 전술을 구사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갈바는 호민관 리보의 법안에 대한 투표일에 두 명의 미성년 아들과 기원전 166년 집정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의 아들이자 제자인 퀸투스 술피키우스 갈루스를 사람들 앞에 데려와서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로마를 위해 애썼건만 이제 야만인들을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게 되었소. 나는 이 수치를 견딜 수 없어 유언장을 작성해두고 죽음을 맞이하려 하니, 부디 이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시오."
그 말을 들은 민중은 눈물을 흘렸고, 리보의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는 갈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부를 퍼부은 덕분에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 후 수 년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던 그는 기원전 144년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당시 먼 히스파니아 속주에서는 갈바가 벌인 만행으로 인해 분노한 루시타니아인들이 대거 봉기하면서 현지 로마군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갈바와 코타는 모두 자신이 루시타니아인들을 상대로 지휘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원로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대했다.
"나는 두 사람 모두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첫번째 집정관(코타)은 (경력이) 아무것도 없고, 두번째 집정관(갈바)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오."
원로원은 아이밀리아누스의 주장에 따라 당시 먼 히스파니아 총독이며 아이밀리아누스의 형제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지휘권을 일임하기로 했다. 그 후 갈바는 기원전 137년에 크레타로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기원전 108년 집정관을 역임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토지 분할을 수행하는 위원회의 일원을 받았다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된 혐의로 추방당한 차남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두었다. 그의 후손 갈바는 서기 68~69년에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