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라틴어: Gnaeus Domitius Ahenobarb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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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손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2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
동기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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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도미티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한 사람이 신성한 모습의 쌍둥이 청년을 만나서 그들에게 뺨을 어루만져지자 수염이 붉게 변했다. 이 인물은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빨간 수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그의 후손들에게 통칭이 되었다고 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기원전 200년 재무관을 맡았고, 기원전 196년 조영관을 맡아 동료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와 함께 많은 공공 목초지를 무단으로 점유한 농부들을 고소해 벌금을 받아낸 뒤 파우누스(faunus) 신을 기리기 위한 신전을 세웠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포도주에 지나치게 중독된 어떤 부인에게서 지참금을 몰수했다고 한다.
기원전 192년, 그는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것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최초로 이뤄낸 성과였다. 이후 동료 집정관과 함께 갈리아 키살피나로 보내져 보이족과의 전쟁을 치러 그들을 진압한 뒤 이듬해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기원전 190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에 참가해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다.
당시 소아시아로 건너간 로마군은 공식상으로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지휘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의 형이자 한니발 바르카를 무찌른 로마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지휘했다. 그러나 형 스키피오가 마그네시아 전투 직전에 중병에 걸려버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아헤노바르부스에게 동생 스키피오를 보좌하는 것을 넘어 군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할 권한을 맡겼다고 한다. 이후 벌어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한때 좌익이 적 기병대에게 돌파당하는 위기를 겪었지만 안티오코스 3세가 몸소 로마군 진영까지 쳐들어가느라 전군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측면이 붕괴되고 중앙의 보병대가 포위되자 그대로 달아난 덕분에 승리했다.
이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발칸 반도에 파견되어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페르세우스 왕에 대항하여 로마에 군대와 물자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임무를 수행한 사절단에 참여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 대해 다수의 학자들은 그의 아들이라고 추정하나 일각에서는 그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62년에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손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을 맡았다. 이후에도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집정관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로마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