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Appius Claudius Pul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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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5년 |
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동기 |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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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조부이기도 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기원전 212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장남이다. 형제로 기원전 184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기원전 177년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있었다. 기원전 195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휘하 레가투스로서 스파르타 참주 나비스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셀라시에 전투에서 기병대와 경보병대를 지휘해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192년 안티오코스 3세의 셀레우코스 제국과 아이톨리아 동맹 연합이 로마와 전쟁을 벌였을 때, 그는 여전히 발칸 반도에 있었다. 기원전 192년 겨울, 발칸 반도 주둔 로마군을 지휘하던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의 지시에 따라 테살리아의 라리사 시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자신의 군대 규모를 부풀려서 적이 로마군 주력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해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군이 라리사 공략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187년 법무관을 맡아 타렌툼을 통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그의 형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착각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185년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리구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투디타누스는 알프스 부족들과 전쟁을 벌였고, 풀케르는 잉가우니 족과 전쟁을 벌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잉가우니 족의 도시 6개와 주민 수천 명을 포획하고 전쟁 선동자 43명을 참수했다고 한다. 그 해 연말에 고위 행정관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로마로 귀환했다. 리비우스는 그가 정적과 대다수 원로원 의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포로 로마노에서 형제 푸블리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여겨졌지만, 그의 이같은 행동 때문에 푸블리우스가 차기 집정관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184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사절단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필리포스 5세에게 트라키아와 타살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아카이아 동맹과 스파르타 사이의 불화를 중재했다. 그는 기원전 174년 아이톨리아 연맹으로 파견된 사절단에 한 번 더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13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