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라틴어: Marcus Iunius Pe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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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조부)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아버지)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0년 |
전임 |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 |
동기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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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독재관.2. 생애
기원전 4세기 말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노빌레스 가문인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들은 로마 왕국 마지막 국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타도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을 자처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데키무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기원전 266년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한다.기원전 230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로마 북쪽 경계를 침입한 리구리아인들과 맞섰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카르타고인들은 이 전쟁에 대해 들었을 때 로마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집정관들이 그들의 영역에 진입하자, 그들은 이 계획을 포기하고 로마인들을 친구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조나라스가 실수했을 것이며, 그가 언급한 '카르타고인'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피케눔 일대의 토지를 로마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로 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법에 동요한 켈트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기원전 225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인구 조사가 실시된 결과 이탈리아 전역에서 로마군 또는 동맹군에 복무 가능한 이가 보병 70만 명, 기병 7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이후 독재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를 기병장관으로 삼고 군대를 보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나이 상한선을 낮춰서 4개의 청년 군단을 구성했고, 부유층으로부터 노예 8천명을 구매해 노예 부대를 결성했으며,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6,000명을 차출해 군대에 배속시켰으며, 동맹국에 추가 병력을 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사원들에 보관된 보석들을 차출해 무기 생산 비용에 충당했다.
얼마 후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 포로들의 몸값을 받고 돌려주겠다는 뜻을 전하며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페라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카르타고 사절에게 릭토르를 보내 "로마에 속한 땅을 당장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 해 가을에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카실리눔 시를 향해 진군했지만, 곧 조점술을 수행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면서 기병장관 그라쿠스에게 군대를 대신 이끌게 했다. 그 해 연말에 로마에서 집정관 선거를 주관해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기병장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신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테아나의 겨울 숙영지로 돌아왔고, 이듬해 봄에 새 집정관들에게 군대를 넘겼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