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라틴어: Lucius Postumius Mege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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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조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아버지)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05년 |
전임 |
퀸투스 마르키우스 트레물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 |
동기 | 티베리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
임기 | 기원전 294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동기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
임기 | 기원전 291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
동기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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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가문인 포스투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스푸리우스와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305년 티베리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삼니움과의 전쟁을 벌였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삼니움 족이 팔레네르가우 시를 공격하자, 두 집정관은 이들을 요격해 승리를 거두고 2,000명 이상의 포로를 확보했다. 이후 겔리우스 가이우스라는 이름의 삼니움 장군을 물리쳐 생포하고 6,000명의 병사를 사로잡았으며, 볼라 시를 공략했으며, 여시를 몰아 로마의 동맹 도시인 소라, 아르피눔, 케센니아를 삼니움으로부터 탈환했다고 한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삼니움인들은 팔레네르가우에 인접해 있는 캄파니아의 아게르 스텔라스 시를 공격했다. 그는 이에 대응해 티페르눔을 공격했고, 아우구리누스는 보비아눔을 공격했다. 메겔루스는 삼니움인과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근의 고지에 숙영지를 세우고 삼니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가 야밤에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숙영지에 수비대를 남겨둔 뒤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동료 집정관이 있는 보비아눔으로 강행군했다. 그러면서 아우구리누스에게 자신이 가고 있으니 어서 전투를 개시하라고 독촉하는 서신을 보냈다.
아우구리누스는 서신을 받는 즉시 군대를 출격시켜 대치 중이던 삼니움군과 교전했다. 전투는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지만 양측 모두 비슷한 사상자만 거둘 뿐 승패가 좀처럼 갈리지 않았다. 이때 메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전장에 등장하자, 삼니움인들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로마군은 그런 삼니움인들을 몰아쳐 섬멸한 뒤 다음날 보비아눔을 포위 공격해 순식간에 함락했다. 또한 메겔루스와 함께 삼니움 장군 스사티우스 겔리우스를 요격해 격파하고 겔리우스를 포함한 여러 삼니움인을 생포했다.
또한 리비우스는 한 기록에는 두 집정관이 보비아눔을 공략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밝혔지만, 다른 기록에는 아우구리누스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고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어 그와 함께 보비아눔을 공략했다고 한다. 그러나 파스티 카피톨리니는 <개선장군 목록>에서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가 삼니움 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개선식을 거행한 사실만 기재되었을 뿐 그가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고대 문헌과는 달리 실제로는 삼니움을 상대로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파이티누스의 공적만 인정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에 따르면, 그는 첫번째 집정관 임기와 두번째 집정관 임기 사이에 조영관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이 자격으로 팔라티노 언덕에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를 기리기 위한 신전을 지었고,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벌금을 부과했다. 기원전 295년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와 함께 로마와 에트루리아 국경을 지키는 군대 지휘관에 발탁되었다. 이때 센티눔 전투를 치를 준비를 하던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로부터 에트루리아를 약탈해 에트루리아인들을 유인하라는 지시를 받자, 켄투말루스와 함께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움브리아인들과 함께 그를 막으려 달려왔지만 격파당해 수천 명을 상실했다.
기원전 294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재차 선임된 뒤 삼니움 방면 군대를 지휘할 권한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런 병에 걸려 출발이 지체되었고, 그 사이 먼저 출발한 레굴루스는 로마와 삼니움을 있는 도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짙은 안개가 낀 틈을 타 습격해온 삼니움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소라로 후퇴했다. 그는 뒤늦게 회복된 뒤 소라에서 레굴루스와 합세했다. 이후 삼니움으로 진군하여 삼니움의 두 마을인 밀로니아와 펜트룸을 공략했다. 하지만 마을과 농지를 아무리 약탈해도 삼니움 족이 전투에 응하지 않자, 원로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삼니움에서 에트루리아로 이동해 에트루리아 연맹의 일원인 볼시니 시의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이를 막으려는 적군을 잇따라 격파했다. 이에 볼시니, 페루시아, 아레티움 시가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고, 메겔루스는 500,000아스의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40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1]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로 귀환한 레굴루스는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전공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이후 그가 귀환해서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그러자 그는 민회에 출석해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호민관 3명이 그를 지지하기로 했고, 그는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원로원을 압박한 끝에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이 일로 원로원을 구성한 귀족들의 적개심을 샀다고 한다.
기원전 293년 1월 1일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호민관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칸티우스가 지난해 집정관 임기 당시 원로원을 무시한 행동을 문제삼아 고발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집정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휘하 레가투스(Legatus:군단장)에 발탁됨으로써 고발을 원정이 끝난 후로 미루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퀼로니아 전투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이로 인해 민중의 인기가 치솟자 정적들은 고발해봤자 무죄가 선고될 확률이 높다고 보고 고발하지 않았다.
기원전 292년 말, 그는 현직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닷새 동안 선거를 주관하는 인터렉스(Interrex)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집정관 후보로 지명했고,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기원전 291년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일은 전례가 없었지만 인터렉스가 자기 자신을 지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용인되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병사 2,000명에게 자신의 밭에 난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게 했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 일을 저지른 병사들은 삼니움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진군하던 중 전염병에 시달려 상당수가 죽어갔고, 사람들은 메겔루스가 신벌을 받았다고 여겼다고 한다.
한편, 전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는 코미니움 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원로원은 구르게스의 임페리움을 코미니움을 함락시킬 때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르게스에게 당장 물러나라고 강요했다. 이에 원로원에서 사절을 보내 제지하자, 그는 "집정관은 원로원의 명령을 받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통치를 행사하는 자다."라며 거부했다. 결국 구르게스는 물러나야 했고, 그는 코미니움 시 공방전을 진두지휘한 끝에 공략에 성공했다. 뒤이어 베누시아를 공격해 역시 함락시켰다. 이때 10,000명의 적을 사살하고 6,000명 이상을 생포했으며, 20,000명 가량의 라틴 이주민을 베누시아에 이주시켰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식민도시로 삼은 베누시아에 이주민을 이주시키는 사업을 이끄는 위원회에 참여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자 화가 나서 모든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후임자가 도착하기 전에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 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요구했지만 원로원은 거부했다. 그는 이번에도 민회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호민관에게도 지지를 호소했지만 세 호민관만 호응하고 나머지 7명은 거부했다. 원로원은 그 대신에 그가 축출한 인물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에게 코미니움 함락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하게 했다. 기원전 290년 집정관에서 퇴임한 그는 원로원의 지시에 불응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혐의로 2명의 호민관에게 기소되었다. 그는 로마의 33개 부족 모두에게 유죄 판결을 받고 500,000 아스를 지불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는 로마 시민에게 부과된 벌금 중 가장 많은 액수였다고 한다.
기원전 282년, 원로원은 로마군 기지에 물자를 보급하러 항해하던 중 타라스 해상을 지나가다가 체포된 로마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절단을 타라스에 파견했다. 이때 그도 사절단의 일원이되었다. 그러나 사절단은 타라스인들의 심한 조롱을 받았다. 타라스인들은 그들이 이상한 옷을 입고 그리스어를 잘 못한다며 비웃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필로니다스라는 술취한 광대가 포스투미우스의 옷에 구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을 비웃는 시민들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오랫동안 울게 될 것이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262년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는 그의 아들 또는 손자로 추정된다.
[1]
리비우스는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도 소개했다. 첫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에트루리아에 가서 승리를 거둔 것은 레굴루스였고, 메겔루스는 삼니움의 일부 도시를 점령한 뒤 아풀리아에서 패배해 부상을 입은 채 루케리아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각각 삼니움과 루케리아에서 싸웠고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