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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퀼로니아 전투 영어: Battle of Aquilon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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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293년 | |
장소 | 아퀼로니아[1] | |
원인 | 제3차 삼니움 전쟁의 일부 | |
교전 세력 | 로마 공화국 | 삼니움 |
지휘관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
미상 |
병력 | 20,000명 | 28,000명 |
피해 | 미상 | 20,000명 전사, 4,000명 생포, 군기 97개 노획. |
결과 | 로마군의 승리 | |
영향 | 삼니움족의 전쟁 여력 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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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293년, 로마군과 삼니움-세노네스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삼니움의 전쟁 여력을 앗아간 결정적인 전투이다.
2. 상세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삼니움-세노네스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294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에게 삼니움 정벌을 지시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은 이대로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들은 레굴루스의 군대가 로마와 삼니움을 있는 도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짙은 안개가 낀 틈을 타 로마 진영을 습격해 진영 중앙까지 침투하여 재무관을 포함한 많은 이들을 살육했다. 로마군은 그들을 어렵게 물리쳤지만 안개 때문에 추격하지 않았다. 이후 레굴루스는 소라로 후퇴했고, 병에 걸려서 출발이 지연되었던 메겔루스가 뒤늦게 회복된 뒤 그와 합세했다.이후 메겔루스가 삼니움으로 진군하여 삼니움의 두 마을인 밀로니아와 펜트룸을 공략하는 동안, 레굴루스는 삼니움군에게 포위된 아풀리아 지방의 루케리아를 구원하러 진격했다가 적에게 요격되어 7,800명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가는 삼니움인들을 추격해 비슷한 숫자의 삼니움인들을 살해했다. 한편 메겔루스는 적이 전투에 응하지 않자 원로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삼니움에서 에트루리아로 이동해 에트루리아 연맹의 일원인 볼시니 시의 영토를 황폐화시키고 이를 막으려는 적군을 잇따라 격파했다. 이에 볼시니, 페루시아, 아레티움 시가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고, 메겔루스는 500,000아스의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40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2]
이렇듯 어떻게든 로마를 물리치려 했지만 갈수록 불리해지기만 하자, 삼니움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장정들 전원에게 소집령을 내렸고, 이에 불응한 이들을 처형하고 유피테르를 기리는 희생제를 거행했다. 6만 가량의 인원이 아퀼로니아 시에 집결했고, 삼니움 사제 오비우스 파키우스(Ovius Paccius)는 아퀼로니아에 집결한 장정들 앞에서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진영 중앙에 판자를 치고 리넨 천으로 덮은 200평방 피트의 건물이 세워졌다. 파키우스는 그 안에 들어가서 조상들이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카푸아를 공략할 때 신에게 받았다고 전해지는 계시가 담긴 아마포 책을 읽었다.
이후 삼니움 병사가 한명씩 파키우스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서 희생 제물처럼 제단으로 인도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누설하지 않기로 맹세했고, 자신이 지휘관들이 이끄는 전투에 들어가지 않거나 전투에서 스스로 도망치거나 적병을 즉시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과 가족과 종족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해야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즉시 살해되었고, 맹세를 한 이들은 자신과 함께 할 전우 10명을 선택하게 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해서 뽑힌 병사가 16,000명이었는데, 리넨 천으로 가려진 건물 안에서 뽑혔기에 '리넨 군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이들의 갑옷이 은색으로 도배되었다고 밝혔다. 여기에 20,000명 가량의 병력이 추가로 뽑혔는데, 군인의 자질 또는 장비의 우수성에서 리넨 군단보다 열등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원전 293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는 지난해 집정관들로부터 군대를 인계받은 뒤 삼니움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각각 아미테름눔과 듀로니아 시를 공략하고 수천 명을 살해하고 그보다 많은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쿠르소르는 대부분의 삼니움 군대가 집결한 아퀼로니아로 향했고, 카르빌리우스는 약 20마일 떨어진 코미니움로 진군한 뒤 포위했다. 쿠르소르의 군대와 삼니움군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삼니움인들은 회전을 쉽사리 벌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삼니움 진영에서 탈영한 20명의 삼니움인이 쿠르소르에게 각각 400명의 삼니움 전사로 구성된 삼니움 20개 부대가 코미니움으로 향했다고 전했다. 쿠르소르는 즉시 동료 집정관에게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린 뒤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적진을 압박했다. 카르빌리우스는 쿠르소르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뒤 8500명 가량의 분견대를 파견해 코미니움으로 향하는 적군을 중간에서 요격하게 했다. 하지만 그 전사들은 코미니움으로 향하던 중 본진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아 본영으로 돌아섰기에, 카르빌리우스는 적을 만나지 못했다.
쿠르소르는 부관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에게 우측 부대를 맡겼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에게 좌측 부대를 맡겼다. 여기에 가이우스 카이디키우스와 티투스 트레보니우스에게 각각 좌익과 우익 기병대를 지휘하게 했다. 보조 부대를 지휘하는 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는 수많은 노새와 3개 코호트를 이끌고 인근 언덕으로 보내졌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인들이 승리를 확신하며 공세를 퍼부은 데 비해 삼니움인들은 거듭된 패배에 익숙해진 데다 강제로 끌려와서 공포스러운 의식을 치른 것에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동족을 적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가 3개 코호트를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적의 후방에 접근했다. 이때 그의 뒤를 따르는 노새들로 인해 먼지구름이 심하게 일자, 삼니움군은 저들이 또다른 집정관 카르빌리우스의 군대라고 여기고 전의를 상실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보병은 자기 진영이나 아퀼로니아로 도주했고, 귀족과 기병은 보비아눔으로 도망쳤다. 볼룸니우스는 적진을 공략했고, 스키피오는 아퀼로니아로 쳐들어가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군을 무리치고 성문 하나를 공략했다. 이에 도시 수비대는 어둠이 깔려서 로마군이 물러난 틈을 타 탈출했다.
로마군은 아퀼로니아 전투에서 적병 20,000명을 사살하고 4,000명을 생포했으며, 군기 97개를 노획했다.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미했을 것이다. 한편 본진으로 귀환하던 8,000 삼니움 전사들은 아퀼로니아 전투 소식을 전해듣자 도주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수십 개의 군기를 추가로 확보했다. 이후 구원을 받을 여력이 없어진 코미니움도 카르빌리우스의 로마군에게 함락되었다. 로마군은 여세를 이어가 삼니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세피눔을 공략했다. 겨울이 찾아오자 두 집정관은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쿠르소르는 캄파니아로 가서 삼니움족의 습격을 대비했고, 카르빌리우스는 로마군이 삼니움 전선에 집중한 사이 로마 동맹국을 공격한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트로니움을 공략하고 5개의 요새를 추가로 함락한 뒤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막대한 벌금을 받아내고 로마로 귀환했다.
제3차 삼니움 전쟁에 대한 유일한 고대 사료를 제공한 리비우스의 서술은 카르빌리우스의 에트루리아 침공 이후 소실되었고 리비우스의 역사서를 요약한 페리오케(Periochae)에서 간략한 이야기만 전해지기 때문에, 이후의 전쟁이 어찌 되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기원전 292년에 집정관에 선임된 뒤 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부관으로 삼아 삼니움족을 정벌한 뒤 적장 가이우스 폰티우스를 체포했으며, 기원전 291년에 총독으로서 삼니움의 가장 큰 부족인 펜트리족을 무찌르고 그들의 거점인 오크리툼을 공략했고,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가 삼니움의 히르피니족을 물리치고 베누시아를 공략했다는 내용은 전해진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로마 원로원은 이 시기에 루카니아와 아풀리아, 삼니움 일대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하고 20,000명의 로마 시민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90년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가 삼니움의 영역으로 재차 침공해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삼니움인들로부터 로마와 영원히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공물을 납부하고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리하여 삼니움은 로마 공화국에 종속되었다.
[1]
현재 이탈리아 몰리세 인근
[2]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도 소개했다. 첫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에트루리아에 가서 승리를 거둔 것은 레굴루스였고, 메겔루스는 삼니움의 일부 도시를 점령한 뒤 아풀리아에서 패배해 부상을 입은 채 루케리아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각각 삼니움과 루케리아에서 싸웠고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