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니움 전쟁의 전투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차 삼니움 전쟁 | ||||
가우루스 산 전투 | 사티쿨라 전투 | 수에술라 전투 | 기원전 342년 로마군 반란 | ||
제2차 삼니움 전쟁 | |||||
네아폴리스 공방전 | 임브리니움 전투 | 카우디움 협곡 전투 | 라우툴레 전투 | 타라키나 전투 | |
수트리움 공방전 | 페루시아 전투 | 바디모 호수 전투 | 메바니아 전투 | 알리파에 전투 | |
보비아눔 전투 | |||||
제3차 삼니움 전쟁 | |||||
티페르눔 전투 | 기원전 296년 에트루리아-삼니움 전역 | 카메리눔 전투 | 센티눔 전투 | 아퀼로니아 전투 | }}} |
1. 개요
제2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314년, 로마군이 삼니움군을 격파한 전투.2. 상세
기원전 315년, 삼니움족이 라우툴레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이에 아우소네스, 아우소나, 민투르노 등 리리스 강변의 세 개 도시들과 캄파티아와 라티움 경계에 위치한 베스키아는 삼니움의 편으로 돌아섰다. 로마는 아우소나에 군대를 즉각 파견했고, 몇몇 귀족들이 로마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공략한 뒤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학살이 끝난 뒤 아우소나에 남은 인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루케리아가 로마 수비대를 삼니움인들에게 넘기고 투항했지만 인근에 있던 로마군에게 도로 공략당한 뒤, 그곳 주민들을 역시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간 후 2,500명 가량의 로마 시민들이 루케리아로 이주되었다.기원전 314년, 카푸아의 몇몇 귀족들이 로마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삼니움에게 캄파니아로 쳐들어와 준다면 호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혹한 삼니움인들은 캄파니아로 진군했다. 당시 집정관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소라를 공략하고 아우소네스, 민투르노를 잇따라 점거했다. 그러다가 삼니움군이 캄파니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위협할 수 있는 카우디움에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그들은 카우디움으로 이어지는 산길의 끝으로 이동해 적의 진군로를 차단했다. 삼니움군은 다른 산길 끝에 주둔했고, 양자는 서로 대치하기만 할 뿐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다 삼니움 측이 다른 길을 택해 캄파니아의 평평한 지역으로 이동하자,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타라키나에서 따라잡았다. 이후 양측간의 기병 전투에서 로마군이 우세하자, 두 집정관은 전투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로마군은 평상시처럼 군단을 중앙에,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지만 기병은 로마 진영을 방어하는 데 집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에텔리우스는 상대적으로 밀집 대형을 갖춘 좌익 부대를 지휘했고, 술피키우스는 좀더 개방된 대형을 갖춘 우익 부대를 배치했다. 포에텔리우스는 밀집 대형으로 상대의 진형을 단숨에 허물기를 희망했고, 술피키우스는 적의 우세한 병력이 아군을 포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전열을 가급적 얇게 확장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포에텔리우스는 좌익 부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삼니움 보병대가 적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밀리기 시작하자, 삼니움 기병대가 투입되어 아군을 도왔다. 이에 방어만 하고 있던 로마 기병대가 출격해 삼니움 기병대와 맞붙었다. 한동안 격전이 이어진 끝에, 삼니움군이 조금씩 밀렸다. 반면 로마군 우익 부대는 술피키우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적 기병대와 교전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삼니움군이 몰아붙이면서 보병 대열이 뚫릴 위기에 몰렸다. 술피키우스는 적 기병을 격퇴한 뒤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돌아와서 아군을 지휘했고, 금방 허물어지는 듯했던 로마 보병대는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 후 포에텔리우스가 이끄는 좌익부대가 삼니움 우익부대를 돌파했다. 이에 삼니움 좌익 부대 역시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달아났고,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날 30,000명에 달하는 삼니움 병사가 죽거나 사로잡혔다고 한다. 삼니움군 생존자는 말벤툼[1]으로 후퇴했고, 로마군은 삼니움 네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펜트리 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을 포위했다.
독재관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의 지휘하에 보비아눔 공성전이 이어기던 기원전 313년, 삼니움인들이 로마가 리리스 강 동편에 세운 첫번째 식민도시인 프레겔라스를 점령했다. 로마군은 보비아눔 포위를 풀고 프레겔라스로 이동했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삼니움인들이 이미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포에텔리우스는 프레겔라스에 수비대를 배치한 뒤 삼니움 편에 선 놀라로 진격해 며칠 만에 함락에 성공했다. 이후 삼니움인들이 평화를 제안하자 로마 정부는 이를 고려했지만, 기원전 312년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전쟁을 선포하고 삼니움이 이에 호응해 평화 협상을 취소하면서, 삼니움 전쟁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