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0-20 11:40:44

인터렉스

라틴어 interrex

1. 개요2. 상세

1. 개요

고대 로마의 관직. 집정관이 모종의 사유로 인해 공석이 되어서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할 수 없을 경우에 한해 선임되어 5일 동안 선거를 주관하는 임시 관직이다.

2. 상세

인터렉스(interrex)는 '~의 사이'를 의미하는 라틴어 전치사 '인터'(inter)와 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사 렉스(Rex)의 합성어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최초의 국왕 로물루스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뒤 원로원을 구성하는 100명의 의원을 데쿠리아(decuria: 10명의 그룹)로 나눈 뒤 각 데쿠리아에서 한 명의 원로원 의원을 데쿠리아의 수장인 데쿠리오(decurio)로 지명했다. 이 10명의 데쿠리오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인터렉스를 5일간 맡았다. 50일이 지나도 왕이 선임되지 않으면 다시 데쿠리오를 선임하고 그 중에서 인터렉스를 지명했다. 이런 식으로 1년간 지속된 끝에 누마 폼필리우스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로마 왕국 시기 국왕들이 사망하고 새 국왕이 등극할 때까지 공백기 동안 여러 인터렉스가 선임되어 새 국왕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설립했을 거라 추정하지만,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주도한 혁명으로 왕정 체제가 무너진 뒤,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가 새 집정관으로 브루투스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선임될 때까지 인터렉스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인터렉스 지명은 원로원 의원들의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 공화국 초기에는 왕국 시절 처럼 10명의 데쿠리오 중에서 선임되었지만, 기원전 482년부터는 전체 원로원 의원 중에서 선출되었다. 의원들이 인터렉스를 임의로 추천했는지, 제비뽑기를 통해 선임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인터렉스의 수는 초기에는 딱히 정해지지 않아서, 어떤 때는 한 명만 선임되고 어떤 때는 6명이 선임되기도 했지만,[1] 기원전 4세기 중반 이래로 2명을 뽑는 게 관례로 굳어졌다.

인터렉스는 5일 이내에 집정관 또는 독재관을 지명하고, 원로원은 그가 지명한 인물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이때 집정관이 한 명이라도 정해진다면, 인터렉스는 즉시 사임하고 새로 선임된 집정관이 동료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주관했다. 오직 파트리키만이 인터렉스가 될 수 있었으며, 평민에게 원로원 의원 직이 개방된 후에도 이러한 관행은 공화정 말기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호민관들은 인터렉스가 파트리키에게만 이로운 행정관을 선임할 거라 여기고 종종 인터렉스 임명을 격렬하게 반대하곤 했다.

인터렉스가 자신을 차기 집정관으로 지명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지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인터렉스 직위를 이용하는 행태를 보임으로써 모스 마이오룸에 위배된다는 비난을 받고 향후 경력에 장애가 될 소지가 있었기에, 다들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다만 딱 한 명만은 달랐다. 기원전 292년 말 현직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인터렉스에 선임된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는 본인을 집정관으로 지명해 기원전 291년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 후 그는 집정관으로서 독단적인 행보로 일관해 수많은 정적을 양산했다. 결국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인 기원전 290년 원로원의 지시에 불응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혐의로 기소되어 500,000아스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이는 로마 시민에게 부과된 벌금 중 가장 많은 액수였다고 한다. 이 일이 반면교사가 되었는지, 그 후 어떤 인터렉스도 본인을 차기 집정관으로 지명하지 않았다.

비록 임시관직이었지만 원로원 의원들의 인정을 받고 집정관 또는 독재관을 자의로 지명하는 권한을 누린 것이 큰 명예로 여겨졌는지, 로마 정치가들은 자신의 경력을 새긴 비문에 인터렉스를 맡았다는것을 꼬박꼬박 밝혔다. 기원전 52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인터렉스를 맡아 당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패거리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패거리간의 격렬한 시가전으로 인해 집정관 선거를 치르기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했다.[2] 이후 로마 제국이 수립된 뒤 로마 황제가 집정관을 몇 달에 한 번씩 교체하고 보결 집정관들을 주기적으로 선임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으면서, 인터렉스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1]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52년에는 12명의 인터렉스가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만 이름이 전해지고 나머지 11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2] 본래 원로원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선출하려 했지만, 소 카토 등이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라"라고 요구하여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