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라틴어: Gnaeus Cornelius Scipio Asi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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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형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0년 |
전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
동기 |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
임기 | 기원전 254년 |
전임 |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동기 |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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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는 기원전 298년 집정관, 기원전 280년 감찰관을 역임하면서 에트루리아, 켈트족, 삼니움족과의 전쟁을 수행했다. 형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59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다.기원전 260년 가이우스 두일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기 이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집정관을 맡은 뒤 130척의 함대를 통솔함으로써 첫 로마 해군 지휘관이 되었다. 함대는 시칠리아로 향하기 전에 타렌툼 항구에서 그리스계 선원들의 지도하에 해상 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메사나 해협으로 출진한 그는 리파리 제도 수비대가 로마 편으로 귀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리파리 제도는 시칠리아 북동쪽의 작은 섬들로, 이탈리아 본토와 매우 인접했기 때문에 그곳에 주둔한 카르타고군은 로마 공화국의 안보를 항시 위협할 수 있었다. 선원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했고 새로 건조된 선박들은 물이 새거나 지나치게 무거워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노출했지만, 그는 전투 없이 리파리 제도를 접수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고 전함 17척을 차출해 그곳으로 향했다.
로마군은 리파리 항구에 도착한 뒤 그곳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날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분전했고 현재 리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한 함대를 이끌던 한니발 기스코는 즉시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보도에게 20척의 전선을 맡겨 리파리로 파견했다. 그들은 밤에 도착한 뒤 항구를 봉쇄한 후 다음날 아침 적 함대를 향해 불화살을 퍼부을 준비를 했다. 해상 경험이 전혀 없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품고 있던 로마인들은 이 상황에 크게 놀랐다. 일부는 공포에 질려 내륙으로 도망쳤고, 스키피오는 나머지 병사들, 많은 로마 고위 관리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리파리 해전) 그 후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어 로마에 귀환한 그는 당나귀를 뜻하는 아그노멘 '아시나(Asina)'로 불리며 시민들의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그 후 수년간 절치부심하던 그는 기원전 254년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새로 건조된 220척의 함대를 이끌고 메사나로 건너간 후 시칠리아 북부에 있는 카르타고인의 가장 중요한 요새인 파노르무스 공성전에서 해상 봉쇄를 맡아 공략에 기여했다. 그 결과 테르마 시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의 거의 모든 북부 해안 도시들이 로마에 귀부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 귀환한 뒤 기원전 253년 초에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가 파노르무스 공방전에서 카이아티누스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는 기원전 22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