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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03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로마군과 하스드루발 기스코, 시팍스의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스키피오는 이 전투에서 50여년 전에 벌어진 바그라다스 전투의 악몽을 설욕하고 카르타고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널리 통용되는 명칭이 합의되지 않은 전투로, 로마측 사료나 영어 번역으로는 그저 대평원(Campi Magni, Great Plains)의 전투라고 칭하기도 한다. 로마인 이야기 2권에서는 전투의 이름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2. 상세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수백 척의 수송선에 약 35,000명의 병사를 싣고 카르타고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파리나 곶에 상륙했다. 그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 습격대를 보내 마음껏 약탈하게 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더 이상의 약탈을 막고 적군의 이동을 저지하고자 기병대를 파견했지만, 로마군은 살라에카 마을 인근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여기에 마시니사가 합세하면서, 로마군 기병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상당한 전리품과 노예를 확보한 뒤, 스키피오는 우티카로 진군하여 포위하다가, 시팍스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이 진격하자 일단 우티카 인근의 카스트라 코르넬리아 곶으로 후퇴했다.이후 시팍스의 중재를 받으며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평화 협상을 논의했지만, 양국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동시에 철수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하스드루발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스키피오는 사절단을 통해 적진의 약점을 알아내게 했다. 얼마 후, 사절들은 적진의 위치와 방비 체계를 보고했는데, 특히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아군의 두 숙영지가 나무, 갈대 및 불에 잘 타는 재료로 지어진 오두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야습을 감행해 적진을 초토화했고, 하스드루발과 시팍스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우티카는 전의를 상실하고 스키피오에게 항복했다.( 우티카 전투)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고용된 4,000명의 켈티베리아 용병대가 카르타고에 도착하자, 카르타고인들은 스키피오의 군대가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진격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전투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시팍스 역시 누미디아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카르타고군과 합세해, 총 3만의 군대를 확보했다. 기원전 203년, 스키피오는 본국으로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권을 유지한다는 통보를 받은 뒤 우티카에서 출진해 카르타고로 진격했다. 양군은 50여 년전 로마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바그라다스 평원에서 조우했다.
카르타고군 사령관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누미디아 왕 시팍스는 켈테베리아 용병대를 중앙에 배치했고, 카르타고-누미디아 보병과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다. 스키피오는 이에 맞서 하스타티가 전열에, 프린키페스가 중간에, 트리아리가 후방에 배치되는 대열을 편성하고, 기병대를 본대에서 약간 떨어진 양측면에 배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 기병대는 적의 측면에 배치된 카르타고-누미디아 기병대를 향해 맹돌격하여 단숨에 무너뜨리고, 중앙 대열에 포진한 켈테베리아 용병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용병대가 맹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상당한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절친한 친구이자 부관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에게 보병대를 이끌고 용병대를 쳐부수라고 명령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용병대와 전면에서 맞붙는 사이, 트리아리가 용병대의 측면으로 이동하여 공세를 퍼부었다. 용병대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귀순을 청했다. 그러나 앞서 그들에게 입은 손실이 큰 것에 분노한 스키피오는 섬멸 명령을 내렸고, 용병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극소수 외에 전멸했다.
전투에서 완패한 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카르타고로 달아났고 시팍스는 키르타로 도피했다. 스키피오는 본대를 이끌고 카르타고를 압박했고,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는 키르타로 쳐들어갔다. 시팍스는 키르타 부근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였으나 끝내 패배했고, 도주하려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로마군에게 체포되었다. 마시니사는 키르타에 입성한 뒤 누미디아의 군주로 재등극했다. 한편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카르타고로 돌아오다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사막에 숨어서 군벌 노릇을 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군대가 카르타고 인근에 이르자 평화 협상을 간청했고, 스키피오는 한니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배상금을 지불할 것 등을 요구했다. 카르타고는 이를 받아들이고 한니발과 마고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한니발은 15,000명의 최정예병을 이끌고 본국에 귀환했고, 마고 역시 귀환했으나 도중에 인수브리아 전투 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한니발이 도착하자, 카르타고는 평화 협상을 파기하고 전쟁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원로원으로부터 "사형을 취소할 테니 돌아와서 한니발의 군대와 통합해 적과 맞서라"는 통보를 받고 즉시 돌아갔다. 그러나 도시로 돌아간 그는 연이은 참패로 수많은 시민을 죽게 만든 주제에 무슨 낯으로 돌아왔느냐는 시민들의 질책을 받았고, 급기야 폭도들의 습격을 받자 가족의 묘지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한니발은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스키피오와 만나 강화 회담을 가졌다. 그는 "당신이 이긴다 한들 당신의 명예에는 그닥 중요한 것이 더해질 것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일을 그르치면 당신은 여태까지 이룬 모든 영예를 잃게 되오. 그러면 여태까지 당신을 설득하려 한 나는 뭐가 되겠소?"라며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베리아, 리비아와 로마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섬들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카르타고가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두 명장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최후의 전투인 자마 전투를 감행한다.